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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받으러 가는 길

죽장 2012. 2. 16. 10:49

편지 받으러 가는 길

- 정인환 -

 
  2006년1월15일이였다. 맏손자가 해병대에 입대한다고 머리를 빡빡 깎고 큰절로 인사하고 떠날 때, 차마 정면으로 손자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에 입대 한다기에 처음엔 반대도 했지만 손자는 돈 주고도 경험 할 수 없는 좋은 기회라며 기어코 가겠다니 더 말릴 수도 없었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해병대의 표어처럼 해병정신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이날도 몰아치는 칼바람은 코끝을 에는 매서운 날씨였으니 내 마음은 더 욱 안쓰럽고 걱정스러웠다. 
  며칠 지나, 해병대 홈페이지에 훈련병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편지를 썼다 받아볼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설마, 한 장 쯤이야 받아보겠지 하는 마음도 들지만 옛날 내가 제주도에서 신병훈련 받을 때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든 가족의 안부편지를 생각하면 자손들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며 시간 나는 데로 편지를 썼다. 
  손자가 훈련을 마치고 위로휴가를 나와서 하는 말이 저녁점호 시간에 부대 방송으로 편지를 낭독하는데 내용을 들으니 할아버지의 편지가 분명한데 뭣 때문에 방송을 하는지 긴장하고 있는데 낭독이 끝나고 부대장이 편지의 주인공 앞으로 나오라고 불러내서 연세가 높으신 할아버지가 인터넷을 하시는 것도 대단하지만 편지내용이 전 장병에게 격려가 되니 할아버지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자고 제의해서 전 부대원들이 힘찬 박수를 받고 어깨가 우쭐 했다는 이야기를 들고 내가 늦게나마 컴퓨터를 배우기를 잘했구나. 생각했었다.
  맏손자가 전역하고 1년 후, 2009년 1월 6일 둘째손자가 또 군에 입대한다고 큰절로 인사하고 나설 때 나도 따라나셨다. 입대부대가 시내에 있고 내가 창설한 부대이기에 호기심도 동했기 때문이다. 내 맏손자가 입대할 때도 그렇게 추웠는데 오늘도 너무 춥다. 남자가 군에 간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증표의 의식인데도 아직도 너무 어린 철부지 같이 느껴져 안쓰럽고 이 추운겨울에 고된 훈련을 견뎌낼까 걱정이 앞선다.
  부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손자는 제 친구들과 예기를 나누며 집결장소로 올라가고 나도 뒤를 묵묵히 따랐다. 옆을 보니 허리가 ㄱ자로 굽어 이마가 땅에 닿을 듯 구부린 할머니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종종걸음으로 한 무리의 뒤를 열심히 걷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를 잠시라도 더 보려고 저렇게 힘들게 걷고 있다. 보장성 보험이 아닌 조건 없는 짝사랑을 하고 있는 할머니의 그 마음을 손자도 알고 있을지, 생각하며 걷다보니 집결장소까지 왔다. 
  똑 같은 까까머리 들이 무리에 섞여지니 어느 놈이 내 손자인지, 발돋움으로 겨우 찾아 손을 흔드니 손자는 엉뚱한 곳으로 병아리 어미 찾듯 두리번거리고 있다. 한참만에야 손자의 빨개진 눈과 마주쳤다. 억지미소로 손을 흔들어댄다. 곧이어 인솔 장교의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구령에 따라 부모님께 큰절로 인사하고 어디론가 데려간다. 무엇을 잃어버린 듯 허전한 마음으로 몇 번인가 뒤돌아보며 그 자리를 나와 부대시설을 둘러봤다. 
  산비탈 군막 맨바닥에 가마니 깔고 모포 한 장으로 두 사람이 덮고자든 생활관은 포근한 유스호스텔로 변했고 깊게 패인 웅덩이에 엉덩이를 까놓고 수십 명이 둘러앉아 용변보든 화장실은 어느 호텔 화장실 못지않다. 막사모퉁이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반합 속 뚜껑에 보리밥 한 주걱에 어름이 사각거리는 콩나물국물로 기갈을 못 때워 짬 밥통을 뒤지든 식당은 어느 기관의 구내식당과 다를 바 없고 탄통으로 만든 세수 대야에 물을 받아 수건으로 몸을 닦든 모욕 실은 사회의 어느 대중탕보다 못지않음을 보고 약간 안도하며 돌아왔다. 
  반세기가 지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며 또 편지를 썼다. 설을 지난 며칠후, 대문 간 우편함에 편지 한 장이 꽂혀있다. 손자가 보낸 군사우편이다. 얼마나 기다리든 소식인가. 반가움에 손을 떨며 얼른 뜯었다. 가족의 안부를 묻고 단체생활에서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운다고 술회했다. 또 소대장이란 직책을 맡아 인간관계와 리더십도 배운다 했다. 밤에 혼자서 근무 서며 느낀 감회도 술회했다. 
  시끌벅적하든 병영도 잠든 고요한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면 집 생각도 났고, 설날에 온가족이 모인자리에 비어 있는 제자리를 생각하니 묘한 감정도 들었다며 또박또박 쓰면서 편지지에 떨어트린 눈물의 흔적이 역력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온실에서 자란 연약한 화초가 폭풍우 몰아치는 황야에 이식해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지만 울컥한 연민에 편지를 내 얼굴에 비비며 늙은 내 눈에 남아있는 눈물을 짜 내게 한다. 
  나는 이번에는 인터넷 편지가 아닌 육필로 답장을 썼다. 나는 제주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 남국적이라지만 2월의 삼방산을 감도는 모슬포의 바닷바람은 헐벗고 굶주린 신병들에게는 살을 에는 칼바람이었다. 돌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받는 학과 교육이나 모슬봉을 오르내리는 포복 훈련도 돈만 있으면 기간장교들이 운영하는 이동주보에 빵 한 개를 사서 먹는 동안은 훈련에 빠져도 괜찮았다. 빵을 들고 혀로 핥으며 시간을 보내는 이 고지, 모슬봉을 빵고지라 불렀다. 
  전우들은 편지도 오고 돈도 보내는데 나는 편지를 수십 통 보냈건만 답장이 없으니 집의 안부를 알 수가 없었다. 큰형도 군복무중인데 둘째형이 전사함으로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4년째 와병중이다. 농촌에서 내 땅 한 뼘 없고 동전한품 벌어올 사람 없이 내가 사실상 가정을 이끌었는데, 아버지 병세는 좀 어떠하신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소식을 못 들으니 애타는 마음에 몸서리치며 신병훈련6개월과 병과교육 등 8개월을 눈물로 지옥 같은 기간을 보냈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김해의 수송학교에서 4주간 교육도 마쳤다. 운전교육을 마치니 꿈에도 그리든 1박2일의 특별외출 허가를 받았다. 구포역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왔으나 날은 임이 저물었다. 영천가는 막차도 떠난 지 오래란다. 무작정 걷다가 아양교 다리위에 서서 지나는 차를 세워도 못 본체 지나간다. 양팔을 벌리고 길을 막고 섰으니 트럭한대가 멈추기에 무조건 올라타고 애원해서 금호까지 왔으나 우리 집까지는 사일 못을 지나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하는 호젓한 오솔길이다. 
  밤은 깊어 인적은 끊어졌고 무서움에 머리끝이 곤두서고 눈에 헛것도 보인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달렸다. 9㎞가 넘는 산길을 달려 마을에 도착하니 밤은 자정을 넘었고 옷은 땀으로 함빡 젖었다. 고요히 잠든 산촌에 군화발소리에 놀란 개들만이 동내가 떠나도록 합창으로 짖어 댄다. 오매불망 그리든 집 문 앞에 서서 헛기침을 하며 먼길 돌아 그 동안 못 받은 편지를 다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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