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박세리시대

죽장 2011. 10. 18. 16:01

[2011.10.18, 조선일보에서]

박세리시대

 

애니카 소렌스탐은 2008년 플로리다에 있는 트럼프 인터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은퇴 경기를 앞두고 부동산 왕 도널드 트럼프와 프로암 경기를 가졌다. 두 사람이 간결한 스윙법이나 돈 되는 사업요령을 몇 마디씩 주고받던 중 트럼프가 불쑥 물었다. "애니카. 저 한국 선수들 대단한 것 좀 보세요. 어떻게 저렇게 잘들 치지요?" 애니카가 말했다. "저 선수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7시까지 치핑·퍼팅을 연습해요. 밤 7시에 보면 그때도 연습을 하고 있지요."

▶소렌스탐이 LPGA에 입문한 1993년부터 2008년 물러날 때까지 15년 동안은 '애니카 시대'로 불린다. 본인이 은퇴(retirement)라는 말을 거부해 '잠정 집계'이긴 하지만, 그는 LPGA 투어 72회 우승, 프로대회 통산 93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최고 전성기 2001~2005년 사이엔 이혼을 겪으면서도 104개 대회에서 43회 우승을 거두고 우승 확률 41.3%를 기록했다.

▶지난 주말 말레이시아에서 끝난 미국 LPGA 투어 사임 다비 대회에서 최나연이 세계 랭킹 1위인 대만선수 청야니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 구옥희가 처음 쾌거 소식을 들려준 후 23년 만에 우리 여자 선수들이 '미국 무대 100승 드라마'를 완성했다. 1998년 박세리가 '맨발의 투혼'으로 US여자오픈을 제패할 때 최나연은 그걸 지켜봤던 초등학생이었다.

▶소렌스탐이 물러나기 전 해부터 3년 동안은 멕시코 선수 '오초아의 시대'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가정에 전념하겠다"며 작년 봄 은퇴할 때까지 미 LPGA 투어를 27회 우승했고, 3년 연속 랭킹 1위를 지켰다. 2007년 한 시즌에만 상금 400만달러를 거머쥐며 그 전까지 소렌스탐의 286만달러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러나 소렌스탐에게도 오초아에게도 그들을 보고 미래의 꿈을 키웠다는 '키드 그룹'은 없다.

▶박세리를 보고 처음 골프채를 잡았던 '박세리 키드'들이 어느새 소렌스탐과 오초아를 위협했다. 2008년 소렌스탐 은퇴 경기에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선수도 박세리 키드인 신지애였다. 한국의 100승 드라마 중 박세리는 혼자 25승을 올렸고, 아직도 현역이다. 박세리와 그의 키드들이 만드는 '박세리 시대'는 이제 한 세대(世代)를 뛰어넘을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