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5, 조선일보]
학벌주의 깬 고3들
호경업(산업부 현장기업팀장)
대우조선해양의 첫 고졸 관리직 공채에 특목고 학생과 일반고 내신 1등급 학생들이 몰렸다는 기사가 나가자 방송국의 한 간부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 중년 간부는 자신을 30년 전 부산의 명문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우조선해양에 입사했던 고졸 사원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돌이켜볼 때 나는 인생을 너무나 힘들게 살아왔다"며 자신의 얘기를 들려줬다. 당시 그는 조선소의 중요 보직 중 하나인 설계 분야에서 일했는데, 8년 이상을 현장에서 꼬박 근무해야 대졸 신입사원과 비슷한 월급을 받는 현실을 깨달았다. 승진 경쟁에선 고졸자가 부장이라도 되면 '고졸 신화'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에게 학력 장벽은 깰 수 없는 철옹성처럼 보였다.
좌절 끝에 그가 선택한 길은 7년간의 조선소 생활을 접고 뒤늦게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졸업 후 인기 직업 중 하나인 방송국 PD가 됐다. 의외로 그는 이 진로 변경을 잘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계속 조선소를 다녔으면 지금쯤 세계 1등 조선산업을 이끌어가는 설계 분야의 대가(大家)가 돼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어쨌든 조선소 현장에서 익힌 노하우를 몽땅 포기한 것은 국가적이나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대우조선해양은 고졸 관리직을 따로 뽑아 4년간의 사내 교육을 거쳐 설계·회계·생산관리 등 각 분야에서 대졸사원과 똑같은 대우를 하겠다는 획기적인 채용안을 내놨다. 예전과 다른 점은 회사에서 체계적인 교육과 차별 없는 대우를 하겠다는 공개적인 약속과 제도 마련이었다.
접수 마감 결과 3199명의 지원자 중 과학고·외국어고 등 특목고생을 포함한 내신 1·2등급 학생 500여명이 있어 깜짝 놀라게 했다.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지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새로운 채용방식에 대해 얼마나 호응이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했다. 잠재력을 가진 고3 지원자가 학벌(學閥)주의에 빠져 있는 주변의 만류를 뚫고 지원할지 의문이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기우(杞憂)였다. 입사지원서를 낸 학생들은 앞 세대가 그토록 갈망하던 학벌과는 상관없이 '실력이 최고'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기성세대보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더 유연하고 전향적이다. 이미 그들은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이 80% 안팎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지만 비싼 등록금을 내느라 빚더미에 오르고도 대졸 실업자가 넘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인천의 일반계 고교 내신 1등급 여학생은 "비싼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결국 공부할 시간이 없게 될 텐데, 그럴 바에는 산업현장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고 싶다"고 털어놨다. 한 과학고 학생은 "친구들이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하고 싶었던 조선 관련 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실력을 쌓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들 학생의 고민은 입사 이후에 있었다. "우리가 잘한다는 평가를 받아야 후배 고졸 사원들을 더 많이 뽑을 것 아니에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가장 부담이 돼요." 이 말을 들으며 기성세대들이 쌓아올린 학벌이란 후진국형 장벽을 고등학생들이 먼저 허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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