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발바닥 (정성희)

죽장 2010. 12. 6. 15:37

발바닥


정 성 희

 

   어찌 저리도 못생겼을까. 작다 못해 땅에 붙은 난쟁이 모습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조차 고개를 가로젓는다. 신은 그에게 남몰래 어두운 곳에서 소금으로 절여진 밥을 평생토록 빚어내게 명하시며 무기징역이라는 천형을 선고하셨다.


   창세기 몇째 날, 창공을 비상하는 새들에게는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이신다고 말씀하셨다. 식물들에게는 이파리에 엽록소를 심어주어 햇빛과 물만으로도 굶지 않게 만드셨다. 심지어 하느님이 등 돌린 뱀조차 어쩌면 그보다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뱀은 신진대사가 느려 일 년에 단 한 번의 먹이로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끼의 양식도 거를 수가 없는 우리 인간은, 아직도 원죄에서 사면 받지 못해서인지 평생토록 땀 흘리며 밥을 벌어야 한다. 이로 보아, 아담과 하와를 꼬드긴 뱀보다 더 큰 죄를 지었음에 틀림없겠다.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누구나 다 밥을 먹는다. 먹는 것에 대한 욕구가 가장 우선되는 본능이다. 그러다 보니 밥 한 톨에 사람의 인격이 비굴해질 수 있다.

   생애 전반에 걸쳐 밥만큼 비참하게 내 존재를 지배했던 것은 일찍이 없었다. 밥이란 쌀을 익힌 단순한 먹을거리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대선사들의 오도송보다 절박하다.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장사 없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결기가 대쪽 같은 선비라도 별 얼고 돌 우는 추위와 뼛속까지 고파오는 허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게다. 육체는 지성적이기보다는 본능에 더 정직하기 때문이다. 원형에 충실한 삶일수록 생존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밥을 벌어 본 사람은 경험했으리라.

   한평생 그놈의 올무에 갇혀 노동을 해 오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골골이 접힌 주름진 세월을 사다리 타고 더듬어 본다. 삼베처럼 거칠고 까칠하다. 얕은 눈어림으로는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무구한 깊이가 짚어진다. 가장이라는 등짐을 지고 세상 속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쓴 흔적들이 아버지 발바닥에 그대로 묻어있다. 본래 있던 문양은 닳아 헤어지고 노동의 때가 낀 선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가족이라는 바닥짐을 짊어지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만 하는, 보통을 초월한 외톨토리의 고독이 그 안에 녹아서 소금덩이로 얼비친다.

   발바닥 위로 세상바람이 얹히자, 상처 난 인생이 뒤꿈치에 달라붙어 너덜거린다. 그 위에, 식구들의 양식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던 까칠한 시간들이 마른버짐처럼 하얗게 새겨져 있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난을 겪었기에 노동의 붓질로 저리도 모질게 소금 꽃을 피워낼 수 있었을까. 계절은 나무에 형형색색의 꽃을 품지만, 세월은 발바닥에다 흰 소금 꽃을 담았다. 거기에는 시절에 밀려 멈춰버린 아버지의 소망도 함께 버무려져 있다. 발바닥에서 피는 꽃이라 화려하진 않아도 눈과 마음을 더 길게 잡는다. 빼어나게 아름다워야만 꽃이던가. 평생을 바친 인고의 세월이 피워낸 흰 꽃의 숭고함을, 한 철에 피었다 지는 뭇 꽃들의 가벼운 향기에 어찌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러한 아버지 발바닥에서는 언제나 짠내가 났다. 짠맛에는 신비가 있다던가. 소금물이 그렇고 양수가 그렇고 발에 배인 땀이 그러하다. 바닷물은 썩지 않으려고 소금을 만들고, 양수는 태아가 자라도록 소금을 만들고, 아버지 발바닥은 당신 육신을 태운 소금으로 밥을 만드셨다. 한 줌의 따사로운 햇살도, 한 무리의 싱그러운 바람도 외면한, 음습하고 좁다란 공간에서 발바닥은 벌판이 되어 그 안에서 이삭이 나고 곡식도 여물어 밥이 지어졌다. 자신의 몸뚱이를 제물로 바쳐 누에 실 게워내듯 아낌없이 소신공양하는 발바닥의 숭고한 희생으로 나는 아버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고운 꽃들을 피우기 위해 컴컴한 흙 속에 갇힌 뿌리의 존재를 모르듯, 거칠고 위험한 곳도 마다않고 밥을 탁발해 온 등신불의 거룩한 십자가를 하마터면 잊을 뻔하지 않았던가.

   내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나도 하루 종일 낮도깨비마냥 밥을 구하러 길거리를 배회하다 가난의 냄새 따라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삿대질해 대는 하루를 달래다 고개 한번 들지 못한 발바닥을 어루만지며 기지개를 켜준다. 세한지에 물감이 번지듯 노곤함이 젖어든다. 망각의 강물에 두 발을 담가 열 발가락 사이 아리고 쓰린 삶의 가락을 씻어 내린다. 막막한 현실에 군데군데 긁히고 흠집 난 하루를 한 그릇의 밥으로 벗겨내고, 덜 여문 마음자락도 훑어낸다. 나른하게 데워지는 발바닥 위로 밤의 안락함이 얹히자 태초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잠이 든다.

   창 너머 푸르스름한 이내가 발바닥을 간질이며 발등 위에 앉는다. 어둠을 탁탁 털어낸 세상이 하나 둘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물들도 소리 없이 되살아난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부릅뜬 눈으로 달려오기 전에 새벽의 임종을 지켜보던 발바닥은, 서둘러 신발 속에 온갖 격식과 규율을 쑤셔 넣고 하루치의 노역을 담아 타박타박 길 떠날 채비를 한다.

   하루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온갖 외침으로 들뜬 세상 소리가 발아래로 잽싸게 밀치고 들어온다. 간악하게 웃어대며 종종걸음 치는 세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뒤뚱거리는 내 발이, 전족한 중국 여인의 쫓기는 듯 총총한 발걸음 같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지만, 창자까지 꼬이는 생채기를 보수하느라 남몰래 분주하다. 그럴 때면 일상을 냅다 가로질러 무단횡단하고 싶어진다.

   밥은 쌀을 익힌 부드럽고 순한 곡식이지만, 이렇듯 횡포를 부리며 감내할 수 없을 만큼의 고뇌도 덤으로 준다. 세상을 발등 위에 이고 온몸이 으스러지는 통증을 참아내며 호미로 밭 매듯이 꼬치꼬치 하루를 캐지만, 벌어 온 밥은 늘 가난의 복판에 있다. 아무리 자맥질해도 쉽게 닿을 수 없는 밥은 영혼의 허기마저 불러일으켜 저승만치나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 와중에 눈치 없는 창자는 연신 밥 달라고 보채대니 밥은 찬 듯 비어있고, 허전한 듯 차오르는 요괴 같다. 하늘을 우러러 빌고 땅을 어루만지며 달래도 그저 기가 찬 노릇이다. 발등 위에 가족의 빈 목구멍을 매달아 똥물이 나오도록 힘껏 끌어당겨 보지만, 삶이란 늘 제자리일 때가 많다. 먹고 사는 생존투쟁이 한 맺힌 악귀보다 더 두렵고 막막하여 밥벌이를 잘하는 방법을 구하지만, 신의 영역인지라 쉬이 일러주지 않는다.

   얻을 것이 있어야 생명이 꼬인다고, 밥을 흥정하다 사람들과 얼키설키 뒤엉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할 때가 허다하다. 사람들은 더 많은 밥을 차지하려고 제 몫이 아닌 줄 알면서도 북북 우겨대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운다. 밥에는 이런 억지가 있어서인지 입 안에 넣으면 곧바로 비린내가 난다. 그러고 보면 밥은 종교를 넘어선 종교 이전의 종교이며, 인의예지의 기초다. 현실은 언제나 밥을 요구하기에, 낱장도 온전히 차지 못하는 반쪽에 불과한 지폐가 철천지원수 같다. 돈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서푼짜리 인품으로도 공자 행세 할 수 있으니 그 위력은 참으로 엄청나다.

   조여 매었던 신발 끈을 끄르고 켜켜이 재워둔 세상사를 옆으로 밀쳐둔다. 꽉 낀 하루에 퉁퉁 불은, 소금기 배인 발바닥에다 햇빛 낱장을 떼어 말린다. 발가락마다 틈을 비워 바람도 걸쳐두고는 두 발을 뉜다. 잠시라도 가쁜 숨을 그칠 수 있으니 해탈이 따로 없구나 싶다.

   빈 동굴에 메아리가 퍼지듯, 내 몸 구석구석에서 깨우침의 소리가 울린다. 청잣빛 물이 들던 시절엔 밥 한 톨도 허투루 버리지 마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말씀이 그저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 후렴되어 들릴 뿐이었다. 육신에 해거름이 길게 내려앉을 때서야 비로소 당신의 넋두리가 살아있는 법구경이 되어 가슴으로 전해진다. 그제야 부끄럽게만 여겨졌던 아버지 발바닥이 얼마나 든든하고 안온한 둥지였는지, 세월 한 자락을 삭히고서야 큰 깨달음 한 올을 건져낸다.

   눈 감고 있어도 가는 것이 세월이라 했던가. 세상의 구심점에서 밀려나 그늘 속에 묻힌 아버지에게 한풍을 견뎌낸 힘찬 용기와 기백은 간 곳이 없다. 생의 기를 다 소진해 버린 탓일까. 이 많은 먹을거리들을 지상에 차려놓고 초로의 발바닥은 물러가고 있다. 신은 생활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영면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무게를 방생해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 발바닥에게는 명예로운 졸업학위를 수여하고 그간의 공로를 만천하에 말씀으로 내리셨다. 도나캐나 다 내어주고 비워낸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읽고, 그리스도의 헌신과 사랑의 무구한 깊이도 짚어주셨다.

   하루살이가 밤이 무언지 모른 채 일생을 마치고 잠자리가 겨울의 눈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것처럼, 젊었을 땐 늙음이란 내게서 전생만큼 아득하게 보였다. 시간은 사람을 묵게 만드나 보다. 내가 가을이 되면서 힘들게 한 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아버지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시구가 내 마른 두 눈에 물너울을 지게 한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발바닥에 쌓인 소금으로 밥을 빚는다. 아직은 세상 위로 어설프게 들뜬 내 발바닥이 시나브로 아버지의 세월을 물들이며 훗날 당신의 빈자리를 이어갈 그림자가 될 것이다. 서편에 기운 해를 이고 자신의 삶을 여지없이 불사르는 가을 단풍처럼, 헌 세대는 가고 나의 한살이도 저물어 또 다른 삶이 대를 잇는 하얀 동그라미인생이 빈 발바닥에 그려질 테다.

   오늘도 내 발바닥은 신이 선고한 종신형을 받고 흰 소금 꽃을 피우며 복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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