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단상

빛 바랜 반성문

죽장 2010. 7. 19. 15:07

빛 바랜 반성문



  교단생활 30여년이다.

  교사로 15년, 관리직과 전문직으로 지낸 15년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학생들만 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교사도 함께 철이 없었던 초임시절을 거쳐 중견교사 시절을 보냈다. 그동안 직업교육 실현에 일정부분 이바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체에게 근무했던 현장경험이 뒷받침되었음이 분명하다.

  무엇에 홀려서 그랬을까.

  하여간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일자리를 박차고 교직으로 뛰어 들었다. 첫 부임지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있는 영주공고였다. 소백산 아랫마을의 순박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두 번 째 근무지는 천년 고도 경주였다. 경주공고에서 다시 옮겨 간 곳이 동해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포항의 흥해다. 흥해공고를 마지막으로 교사생활을 접고 장학사로 전직되어 간 곳이 초임교사로 부임했던 추억의 땅 영주였다.

  영주시절의 어느 봄날이었다.

  교장실에서 나를 극진히 가르쳐주셨던 은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은사님은 동생 담임의 부름을 받아 왔으며, 호출한 장본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몸 둘 바를 모르는 채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 후 복학생 K군은 무사히 졸업장을 쥐고 교문을 나섰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직장인이 된 녀석이 결혼한다며 주례를 부탁해 왔으니, 철부지 초임교사 시절의 해프닝이자 작은 보람이었다.

  경주에서는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였다.

  어느 날 길가에 세워둔 오토바이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인근 경찰서에 도난신고를 해놓고 난 며칠 후 길가에서 우연히 내 오토바이를 발견하였다. 달려온 순경에게 덜미를 잡힌 도둑의 얼굴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내가 맡고 있는 학급의 B군이 끌려가는 모습을 대책 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만 용서해주면 철저하게 지도하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어준 후 데리고 나왔다. 함께 자장면을 먹으면서도 허탈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난 철이 들지 않은 교사였다.

  ‘기계’가 나의 전공과목이었다.

  당시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산업 현장이 팽창하고 있는 시기여서 우수한 학생들이 공업고등학교에 몰려들었다. 졸업과 동시에 산업현장에 자리 잡은 그들은 땀 흘리며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들이 있어 우리 모두의 배고픔이 해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는 아이들 뿐 아니라 가르치는 나도 자부심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세월이 변했다.

  산업화시대를 거쳐 정보화시대로 진전되면서 소득의 증가는 삶의 질 향상으로 연결되었다. 아울러 생산인력이 고급화되는 현상에 맞춰 전문계 고등학교 지원자들이 줄어들면서 학교는 천덕꾸러기로 변했다. 변화의 바람은 아이들의 가슴에 타고 있는 희망의 등불을 마구 흔들었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바람이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만 직업교육 분야에 유독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직업인력 양성의 패러다임이 변해가는 지난 세월 수십 년. 나는 지금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빛 바랜 반성문을 쓰고 있다. 회한의 숲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가 멍멍하다.


    교단에서의 30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치지 않았다.

    미래가 있는 교육보다 교사의 현실을 앞세웠다.

    열정적으로 가르친다는 핑계로 회초리도 휘둘렀다. 

    아이들의 성장이 아니라 성과나 실적을 우선시했다.

    때 늦은 반성을 한다.

    내가 맡았던 아이들에게 사과한다.

    동시에 간절한 소망 하나 푸념인 양 늘어놓자면

    비록 내가선 자리는 빛이 없지만

    그들은 아주 멋진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것이니-.


[20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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