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원고와 자료

우리에게 각별한 2010년

죽장 2010. 1. 3. 19:52

우리에게 각별한 2010년 (2010존선일보에서 퍼옴)


 

2010년은 한민족 역사의 굵은 물줄기를 바꾼 사건들이 100년 또는 10년 단위 기념일을 맞는 해다. 100년 전 경술국치가 있었고 60년 전에는 6·25 전쟁이 발발했으며, 50년 전에는 4·19 의거가 일어났다.


100년 전

(8월 22일 한일강제병합, 8월29일 경술국치, 3월26일 안중근 서거)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객사한 이를 고향에 이장하는 것)하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서른한 살 청년 안중근은 이 말을 남기고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안중근은 그 5개월 전인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써 꺼져 가는 나라의 불씨를 살리려 했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결국 1910년 8월 16일 일제 데라우치 통감은 대한제국에 합병조약안을 통보했다. 18일 대한제국 각의에서 이를 통과시켰고,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됐다. 조인 사실은 29일에야 발표했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 1903년 러일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고, 1904년 제1차 한일협약과 1905년 을사조약의 수순을 밟았다. 대한제국은 국권을 강탈당해 이름뿐인 나라로 전락했다.


90년 전

항일민족운동가들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독립군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20년 대규모 병력을 간도에 파견했다.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10여차례 전투에서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 1200여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전투 중 최대 규모, 최대 전과의 전투였다.


70년 전(1940년 9월17일 광복군 창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세웠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당시 "광복군은 한·중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5년 후 일본이 패전하면서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은 자연 무산됐다. 광복군은 1946년 해체됐다.


60년 전(1950년 6월25일 6·25전쟁)

1950년 6월 넷째 일요일,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도선 전역에서 남침했다. 파죽지세의 인민군은 27일 서울 점령 후 7월 3일 한강을 넘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유엔군이 9월 28일 서울, 10월 26일 압록강에 도달했지만 중공군 인해전술에 다시 후퇴해야 했다. 유엔군은 1951년 1월 서울을 재탈환했고 그해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이 맺어졌다.


50년 전 (1960년 4월19일 4·19혁명)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이기붕 당선을 위한 정부의 부정은 극에 달했다.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정권타도 투쟁으로 비약했으며, 기폭제는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이었다. 4월 18일 시위에 나선 고려대생들이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다음 날인 19일 서울의 각 대학과 중·고생, 시민 등 10만여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사임을 발표했다.


30년 전(1980년 5월18일 광주 5·18민주화)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자, 다음날 전남대 학생 200여명이 시위를 시작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은 순박한 시민들조차 항쟁에 나서게 했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카빈소총으로 맞선 시민들의 시가전은 결국 숱한 민간인 희생자를 낸 27일 전남도청 무력진압으로 끝났다.

'강의 원고와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대애행(十大碍行)   (0) 2010.01.19
X세대… Y세대… Z세대  (0) 2010.01.12
G세대의 특징  (0) 2010.01.03
원칙없는 사회를 걱정했던 '간디'  (0) 2009.12.22
애국가 대신 광부들의 울음소리가  (0) 2009.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