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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raw>의 시대가 온다

죽장 2008. 11. 10. 11:27

로<raw>의 시대가 온다



최근 영국에서 출시된 '펩시 로(Pepsi RAW)'라는 제품이 화제다. 음료회사 펩시가 사과 진액과 커피 잎사귀, 포도에서 추출한 타르타르산 등 천연 성분으로 만든 탄산음료인데, 인공적인 이미지가 강한 콜라 제품에 붙인 '로'라는 브랜드 명(名)이 각별한 눈길을 끈다. 웰빙시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트렌드를 함축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로(raw)'의 사전적 의미는 '날것의' 혹은 '가공하지 않은' 등이다. '있는 그대로' 혹은 '때 묻지 않은', '소박한', '간결한' 같은 뜻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생활용품에서 '로'라는 명칭은 군더더기 없이 본질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갈수록 정교해지고 점점 인공적으로 변해가는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 반응을 수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컨대 자전거는 자전거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티타늄 프레임에 24단 기어와 카본 바퀴살 같은 것으로 치장해 1000만~2000만원을 호가하는 자전거와 달리 '로' 형태의 자전거는 순전히 사람의 다릿심으로 가는 자전거를 말한다. 실제로 고정 기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브레이크조차 없는 '픽시 바이크(fixie bike·키워드)'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펩시 사이트 제공 일본의 저명한 디자이너 후쿠사와 나오토는 "오늘날 노멀(normal·평범)한 제품이 사라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은 뭔가 특이한 요소나 기능을 첨가해야 디자인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수퍼노멀(supernormal·비범)한 제품이란 지극히 노멀한 제품을 일컫는다"라고 했다. 과도하거나 눈길만을 끌려는 디자인보다 제품의 본질에 충실한 제품을 만들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로'의 개념을 활용하는 대표적인 브랜드가 일본의 '무지료힌(無印良品·이하 무지)'이다. 7000여 종의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무지는 최소한의 디자인을 첨가함으로써 제품 본연의 기능을 더욱 잘 살린 디자인으로 전 세계에 파급되고 있다. 무지의 디자인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사소한 불편들을 흘려버리지 않고 배려하는 데 가치를 둔다. 쓰레기통을 살짝 기울여 휴지를 넣기에 편리하도록 만든다든지, 평범한 종이 클립이지만 손가락을 다치지 않게 끝을 둥굴린 제품이 대표적인 예다. 비용 절감만을 의식하는 유통업체 PB(private brand·키워드) 방식의 '노 디자인(no design)'과는 다르며, 오히려 한 차원 높은 감각이 요구되는 궁극적인 디자인(ultimate design)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제품들의 눈높이는 어디일까. 그들의 목표는 "그것이 좋다"가 아니라 "그것으로 좋다"이다. 즉, "그것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최고(最高)의 의미가 아니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최적(最適)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최고를 향해 필요 이상의 과도한 디자인으로 치닫던 제품에 절제와 중용의 개념이 더해진 것이다.


요즘은 디지털이나 버추얼 리얼리티(가상현실)와 같은 인공적인 것에 둘러싸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순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또한 재정적 풍요 속에 부유함의 극치를 누리던 세계 경제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의 사고나 생활방식도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다. '로'는 이런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다.


내추럴(natural)이나 오가닉(organic)이 '자연 그대로'라는 1차원적 개념이라면 '로'는 '자연으로 돌아가자, 다만 세련되게'라는 한 단계 발전된 개념이다. 마케터와 디자이너 모두 '로'의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조선일보 2008.11.8. ]

[홍성태 한양대 경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