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터어키에서 보내는 편지

죽장 2008. 2. 9. 15:57

터어키에서 보내는 편지

 

 

 

[파묵칼레에서]

  파묵칼레는 온천 휴양지이다. 에페소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는 데니즐리를 지나 달려갔다. 이곳 파묵칼레 역시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가 다녀간 곳이다. 지붕 꼭대기에 빈병이 꽂혀 있는 것을 본 가이드가 저 병의 의미를 묻는 수수께끼를 낸다.


  「..... 엄마, 내가 옆집 지붕위의 유리병을 깨뜨렸어. 그 집 아가씨 예쁜 것은 엄마도 알잖아. 난 그 처녀가 좋아. 그렇다면 가보자구나, 엄마의 손에 이끌려 처녀의 집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수줍은 처녀는 안으로 들어가 정성들여 끓인 커피를 내왔다. 엄마, 이 커피 맛 좀 봐. 쓴 커피로 거절하지 않았으니 난 이제 달콤한 사랑을 시작할 거야. 동네 사람들 모두가 초청된 결혼축하연은 온 종일 계속되었고, 드디어 해가 기울어 밤이 되었다. 이른바 초야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순백의 수건을 건네주었다. 며느리의 순결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날이 밝아 수건을 받아든 어머니는 기쁨을 참지 못하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 붉어! 너무 붉은 색이야. 네가 처녀였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대문에 높이 걸자. 깃발로 펄럭이게 하자. 만약 이 증명이 없었다면 그 아버지는 수치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명예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훌륭한 선택을 한 아들아. 가문의 명예에 걸맞게 열심히 살아라. 아들, 딸 많이 낳고.....」


  따스한 온천수가 넘쳐흐르고 있는 파묵칼레, 목화밭 너머 저만치에 석회붕이 눈덮힌 산처럼 펼쳐져 있다. 석회붕 언덕으로 가려면 BC 190년에 건설된 도시 히에라 폴리스를 지나야 한다. 글자 그대로 이 '신성한 도시' 입구에 위치한 거대한 공동묘지 아크로 폴리스는 또 하나의 고대도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무덤에 손을 대면 3대가 망할 것이라는 유언도 소용이 없었던 듯 장대한 석관은 오늘 한낱 돌무더기일 뿐이다. 완전한 묘지로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파괴된 을씨년스러운 형체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공동묘지를 지나자 곧 인구 8만 명이 살았던 히에라 폴리스가 나타났다.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 전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조성되었다. 전설적인 왕국 페르가몬의 창건자 텔레포스왕의 아내 히에라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이 도시는 BC 133년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가 왕국을 로마제국에 헌납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 후 기독교 사회로 발전하다가 1334년에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로 그 옆에 목화성(Cotton Castle)이라 불리는 파묵칼레 석회붕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온천이 많지만 이곳은 칼슘과 중탄산염이 함유된 온천수가 수세기동안 흘러내려 목화솜을 쌓아놓은 듯한 모양을 만들었다. 솜뭉치를 쌓은 듯한 절벽을 비롯하여 계단식으로 된 크고 작은 웅덩이에 파란물이 고여 마치 자연수영장처럼 되어 있다. 이 석회언덕을 하얀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석회온천수를 일정시간 간격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지금도 석회수가 흐르면서 갖가지 아름다운 모양들을 만들고 있다.

  눈덮힌 산야, 목화솜으로 장식된 순백의 성에 흐르는 온천수. 그리고 목화성에서 내려다보는 평원이며 석회절벽들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15,000명을 수용하는 야외극장 히에라 폴리스에 잠들어 있는 수 천 년의 역사, 침묵의 도시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공동묘지 앞에서 허무를 느낀다. 삶의 질곡을 건너가면서 만들어가는 크고 작은 아귀다툼의 사연들이 모두 덧없음을 느낀다. 사람의 한평생이 그야말로 찰라인 것을-.



[안탈랴에서]

  안탈랴는 파묵칼레에서 한나절 거리에 있는 지중해의 항구도시이다. 이곳에는 히드리아누스의 문을 비롯하여 구시가지의 정경이 열대식물이 하늘을 찌르며 자라고 있는 신시가지와 아주 잘 어울린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이구동성으로 '꼬리아!'라고 외치니 놀랍게도 ‘대-한민국!’이라고 맞장구를 쳐준다. 우리는 다시 손뼉으로 ‘짜작 짝 짝 짝’으로 응답하면서 지나갔다.

  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라. ‘2002 월드컵’에서 우리와 3, 4위전을 치룬 덕분에 그들의 축구실력은 이미 알고 있는 터이지만 터키의 축구열풍은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 축구경기가 있는 날은 응원하는 팀의 기를 들고 질주하는 사람들이며 택시를 많이 볼 수 있고,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서도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가 당락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니 충분히 알만하다.

  안탈랴의 숙소 인근에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큐텐폭포가 있다. 하늘 가득 물보라를 일으키며 귀를 찢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수십 미터의 낭뜨러지로 쏟아지는 풍경이 대단하다. 지중해 바닷물에 몸을 담궜다가 노을 지는 해변에 드러누우니 잔물결이 찰랑거리며 밀려와 잔모래 묻은 발가락을 간지럽게 한다. 정박한 돛단배가 조용하게 숨을 고르며 흔들리고 있다.

  잠이 든 새벽 홀연히 눈을 뜨니 지중해의 보름달빛이 창가에 쏟아지고 있다. 달은 수평선 위에 두둥실 떠올라 넓은 폭으로 만들어진 비단길을 사뿐히 밟으며 달려와 내 가슴팍에 안긴다. 달빛이 바다에 닿아 부서지며 만든 금가루가 세상에 뿌려지고 있다. 지중해의 달빛이 동방의 손님에게 주는 새벽의 축복이다. 고향도 잊고, 친구도 잊었다. 무심하게 깊어가는 안탈랴의 밤, 깊어가는 그 밤에 한참동안이나 지중해의 달빛을 가슴 가득 품고 세상시름을 잊는다.



[카파도기아에서]

  카파도기아로 가려면 나사렛 호자가 살았던 콘야를 거쳐야 한다. 지중해 연안의 안탈랴까지 오는 길 내내 계속되는 올리브 숲의 한없음에 저절로 혀를 내둘렀었는데, 카파도기아로 가는 길은 또 달랐다. 올리브가 아니라 천지가 밀밭이었다. 눈길이 닿은 지평선 저쪽 끝까지 온통 누런 밀밭 언덕이었다. 한 시간을 달리고 두 시간을 달려 아까 보았던 밀밭 언덕을 넘어가면 또 처음과 같은 밀밭 언덕이 나타나고는 했다. 가도가도 밀밭은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경계가 없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밀밭길을 스쳐지나가면서 한 뼘의 땅, 한 이랑의 곡식이라도 더 가꾸기 위하여 다투고 있는 우리네 삶을 생각한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많다는 양떼를 보면서 나와 내 이웃들이 만들어가는 사랑과 미움의 모습들을 생각한다.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죽으며, 죽은 자리에 묻는다는 유목민 가족의 삶을 보면서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고독이란 단어의 사치스러움을 생각한다. 언덕을 넘고 또 넘어도 한없이 계속되는 밀밭길을 달리면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가난과 풍요를 생각한다. 카파도기아로 가는 그 한없는 밀밭길에는 강력한 삶의 의지가 잠재되어 있다.

  수만 년 전의 화산활동이 있었을 때 용암이 산천을 덮어씌워 아주 특이한 모양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약한 사암과 단단한 용암으로 만들어진 바위 속에 그들만의 터전을 만들었다. 쉽게 파낼 수 있는 바위지만, 또 쉽게 무너지지도 않아서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교회의 천장과 벽에는 예수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나타내는 퇴색된 크레스코화들이 있다.

  계곡 전체에 흙기둥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다. 어떤 바위기둥은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길쭉한 도토리 모양 같았다. 단단한 용암이 뚜껑이고, 아래의 사암은 오랜 세월동안의 풍화퇴적작용으로 길게 깎여서 몸통 모양으로 변했다. 도토리가 두개, 세 개 씩 붙은 모양을 한 것들도 있다.

  사람들은 또 지하에 거대한 도시를 만들었다. 처음 동굴을 파기 시작한 것은 BC 1,200년경부터이다. 여러 제국들이 전쟁을 하면서 패잔병들이 숨어들어 은신처를 만들었고 그 후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면서 오늘과 같은 지하도시가 형성되었다. 많을 때는 200만 명 정도가 생활을 했던 지하도시에 발견된 교회만도 1,000개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하도시 카이막카르에 들어갔다. 가이드는 입구에서 '앞사람의 뒷꼭지를 놓으면 미아가 된다'. '길을 잃은 한 처녀가 아기를 안고 나온 적이 있다'며 잔뜩 겁을 준다. 8,000명의 인구가 6개월간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식량저장고며, 지하의 환기와 파낸 흙을 지상으로 처리하는데 사용되었다는 통기구, 그리고 외부의 침입자들을 차단할 수 있는 맷돌모양의 큰 돌이 신기하였다. 그 박에도 부엌, 포도주 저장소, 시체매장지 등 집단생활의 기능이 완벽하게 있는 도시 전체는 지하 12층까지 있으나 현재는 지하 8층까지만 공개되고 있었다.

  괴뢰메 야외박물관 외에도 낙타모양의 바위들이 솟아 있는 델브란트 계곡, 버섯모양의 바위들이 솟아 있는 파샤바 계곡을 지나서 앙카라를 향하는 발길을 재촉했다.



[이스탄불]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이스탄불은 서울의 1.5배 넓이에 인구가 2,000만 명으로, 지리적,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도시입니다. 2천년간 거대한 두개 제국의 수도로 역사의 흔적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부터 '비잔티움'이다가 4세기 초부터 동로마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풀'로, 11세기 비잔틴제국의 쇠퇴와 함께 아나톨리아에 터키족이 독자적인 문명을 일으켜 마침내 1453년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하면서 이스탄불 시대가 열렸습니다.

  처음 간 곳은 ‘블루 모스크’라 불리우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 입니다. 현재도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에는 하늘을 찌르는 6개의 첨탑에서 코란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사원은, 1603-1617년까지 통치했던 오스만의 14번째 술탄이 성지순례를 떠나며 한 명령에 의하여 위대한 건축가 '마흐맷 아아'가 1609년에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블루 모스크 바로 앞에 분수대가 있고, 오벨리스크 가 있고, 뱀기둥이 있는 '히포드롬'이 있습니다. 오벨리스크나 뱀기둥들은 모두 현재의 지표면보다 2m 정도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월의 흔적입니다. 일천년, 이천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쌓이고 쌓인 흙이 오늘 그만한 높이의 땅거죽이 되어 있습니다.

  가까이에 지하 물창고가 있습니다. 전쟁이 다반사로 일어나던 시절 물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적으로부터 수자원의 보호를 비롯하여 가뭄에 대한 식수원의 확보를 위하여 지하에 물창고를 만들었습니다. 532년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만든 이 창고는 세로 140m, 가로 70m, 높이 8m의 공간을 받치고 있는 336개의 돌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서니  지하에서 나는 특유의 음습한 냄새와 함께 한 방울, 또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신의 음성인 양 지키고 있다. 20km나 수로를 통해 끌어온 물입니다. '눈물의 기둥'을 지나 저편 끝에 뱀의 신 메두사의 기둥 앞에 섰습니다. 하나는 꺼꾸로, 또 다른 하나는 옆으로 뉘여진 채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무슨 향내음이 코를 찌릅니다. 이슬람의 냄새인지도 모릅니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슬람의 소리일 것입니다. 전승기에 빼앗아 온 돌기둥의 수가 도대체 얼마나 많았길레 지붕을 떠받치는 사원을 짓고도 남아 땅을 떠받치는 물창고까지 지었을까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다보고 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뺏고 빼앗기는 인간의 역사를-. 처절한 그 역사의 흔적들을-. 100년, 200년, 아니 1000년, 2000년 그 무궁한 세월의 깊이를-.

  이스탄불 시가지 해안에 거대한 성벽이 연이어져 있습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말없이 서있는 낯설지 않는 풍경입니다. 우리나라꽃 무궁화가 거리마다 만발하여 환영해주고 있습니다. 화려함의 극치인 돌마바흐체궁이며, 종교탄압의 현장인 성소피아 성당, 그리고 세계적인 보석들을 전시하고 있는 톱카프궁전 소식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토로이]

  "터키"하면 생각나는 것이 트로이전쟁, 트로이 목마가 내 상식의 전부였습니다. 터키 도착 2일째인 오늘 마침내 트로이행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와 토로이 사이에 벌어졌던 트로이전쟁의 사연은 대략 이렇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심판하는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비너스)에게 황금사과를 준 댓가로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헤레네를 트로이로 데려왔고,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을 움직여 트로이원정 연합군을 결성하게 된다. 트로이의 견고한 성문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리스연합군은 결국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목마를 남겨두고 퇴각하였고 승리에 도취된 트로이군은 목마를 성안에 끌어들였으며, 목마 속에 숨어있던 그리스군들은 성을 함락시키고 전쟁은 역전되었다.....」

  호메로스의 작품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를 통하여 영웅들의 서사시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이야기는 19세기 이후 허구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슐리만에 의하여 발굴되면서 사실로 확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1930년대 과학적 재조사를 실시한 블레겐은 트로이전쟁이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오랜 세월동안 겹겹이 쌓였던 흙더미를 헤쳐 본 결과, 그 일곱 번째 층이 BC 1250년 무렵에 파괴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트로이 언덕에 딩굴고 있던 잔해들, 우물과 같은 백성들의 삶의 흔적, 무너진 성터는 말이 없습니다. 바로 저기 손닿을 듯한 들판이 바다였다고 합니다. 그리스연합군과 막강 트로이군의 밀고 밀리는 격전지가 한 눈에 보입니다. 전쟁의 신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전쟁영웅들의 함성이며 여인들의 사랑이야기가 발길에 무심히 차이는 벽돌조각에 새겨져 있습니다.

  목마는 부서지고 없지만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일렁이고 있는 바닷물은, 저 모래사장은 그날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뇌리에는 잊혀져 갔을지라도 올리브나무를 흔들고 있는 저 바람은 그때 엿들었던 영웅들의 사랑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건 사랑, 국가의 운명과 바꾼 사랑 말입니다.



[에페소]

  ‘에페소'로 가는 날의 아침은 맑고 더웠습니다. 숙소인 덱길라를 아침 일찍 출발하여, 인구 350만 명으로 터키 제3의 도시 이즈미르를 통과했습니다. 출근하는 차량들로 사가지가 혼잡하기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도시 '에페소'는 도시 전체가 무너진 유적들로 채워져 있지만 정확한 도시의 기원을 알 수가 없답니다.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이곳 에페소로 옮기면서 도시가 크게 부흥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황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머물기도 한 이곳은 각종 건축양식이 발달하여 문화의 꽃을 피운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최소 1500~2000년 전에 쌓았던 성터며, 화장실이며, 도서관, 불씨를 보관했던 장소, 황제의 처소, 2,500명이 모였던 대회의장이 한 낱 돌멩이로 흩어져 딩굴고 있습니다. 종교에 관한 식견이 부족한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곳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전도여행을 왔었고, 교회를 세웠으며, 오늘도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에페소에 딩굴고 있는 돌, 돌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 신앙의 그림자가 여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돌기둥에 그날의 힘이 넘치고 있습니다. 하드리안 황제와 아르테미스 여신, 그리고 에페소 시민을 위해 118년에 지은 코린트형 사원에는 운명의 여신 티케가 조각된 아취문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양손을 벌리고 있는 메두사의 장식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또 셀레시우스 도서관의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해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혜, 사색, 학문, 미덕을 상징한다는 정면 돌기둥 사이에 새겨져 있는 4개의 여성상은 살아있는 것처럼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유곽을 안내하는 인류 최초의 포스터를 지나면 에페소 대극장이 있습니다.

  연단에서 소리치면 순풍의 바닷바람을 타고 마이크 없이도 충분히 들렸다는 바로 그 자리에 오늘은 우리 일행인 대한민국의 청년 하나가 용기 있게 섰습니다. 목청 높여 부르는 애국가가 그날 운집한 25,000명 에페소 시민들을 향하여 울려 퍼졌습니다. 아니 오늘 21세기를 살고 있는 세계인들을 향하여 장엄하게 울려 퍼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목청껏 합창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손바닥이 벌겋도록 박수를 쳤습니다. 그 메아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고대도시 에페소는 말이 없지만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는 흔적들이 말없는 말을 걸어옵니다. 진군의 북소리처럼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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