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의원님도 시어머님도 내 친구

죽장 2013. 12. 17. 16:35

[2013.12.17, 조선일보]

의원님도 시어머님도 내 친구

 

  얼마 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A 의원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대학생으로 보이는 20대 청년이 문을 빼꼼 열었다. "A 의원님 계세요?" "누구시죠?" A 의원의 보좌관 박모(45)씨가 물었다. "저, 의원님하고 '친구'인데요." "네, 친구요? 저희 의원님 50대이신데…." "아, 저 '페친'이에요. '페북(페이스북) 친구!'" 보좌관 박씨는 "의원님 소셜미디어(SNS)를 관리해서 온라인에서 '친구'란 용어는 익숙했는데, 막상 현실에서 들으니 황당했다"고 말했다.

  '친구'가 변하고 있다. 우리말에서 친구는 대개 '동년배에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뜻한다. 한 살이라도 많거나 어리면 '친구'라고 선뜻 부르기가 쉽지 않은 게 한국 정서. 그런데 최근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의 확산으로 '친구'의 의미가 확장·변형되고 있다.

 

◇'일촌'에서 '친구'로

  "나, 우리 시어머니랑 친구잖아." "자기 아들, 나랑 친구잖아." 한국적 친구의 개념으로는 모두 성립할 수 없는 비문(非文)이지만, 소셜미디어에선 자연스레 통하는 말이다. 우리말의 '친구'와 소셜미디어 속 '친구' 개념의 이런 괴리 현상은, 미국식 소셜 플랫폼인 페이스북이 한국에 도입되면서 영어 '프렌드(friend)'를 그대로 '친구'로 번역한 데서 비롯됐다. 영어에서 '프렌드'는 친구, 동료, 지인까지 포함하는 개념. 연령·친밀도와는 크게 상관없이 '아는 사람'에 가깝다. 그들 정서에선 '한 번 본 할아버지뻘 남자'도 '프렌드'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페북 친구'는 '온라인 지인(知人)'이란 의미가 강하다. 일종의 '수입된 친구'인 셈. 역시 미국식 플랫폼인 트위터에서 '맞팔' 관계를 '트친(트위터 친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연장선이다. 일정 기간 쌓아온 우정이 담보됐을 때 우리가 부르는 '친구'와는 범위가 사뭇 다르다.

  페이스북 이전 토종 플랫폼에서 '친구'란 단어는 쓰이지 않았다. 2000년대 초중반 인기를 끌었던 싸이월드는 '친구' 대신 '일촌'이란 용어를 썼다. 싸이월드 공동창업자인 이동형 나우프로필 대표는 "싸이를 만들면서 비교해 보니 한국에선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의 장벽이 매우 높았지만, 서구에선 이 장벽이 낮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한국 문화를 반영해 가장 가까운 친구는 '일촌', 친구의 친구는 '파도타기'를 해서 '일촌의 일촌' 식으로 관계를 확장하면서 촌수를 거듭하는 꼴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페북 친구'가 소개된 이후엔 카카오톡·라인 등 토종 플랫폼에서도 '친구'가 관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세대 차 허무는 '친구' vs 전통 관계 무너뜨리는 '친구'

  일부에선 온라인에서 친구의 의미 변화가 '오프라인 친구'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페이스북 장사의 신' 저자인 김철환 적정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친구라는 단어 하나의 의미가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훨씬 쉽게 세대 간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다"며 "페북 친구가 확산되면서 장유유서(長幼有序) 문화가 유연해지고 있다"고 했다. SNS 강사인 김영숙(61)씨도 "3년 전 처음 SNS를 할 때만 해도 나보다 어린 사람한테 '친구'라고 부르는 게 어색했지만, 지금은 온라인에서 알게 돼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딸보다 더 어린 친구'도 많다"고 말했다.

  반면 플랫폼 전문가 박성혁 '데모데이' 부사장은 "온라인에서 친구라 해도 오프라인에서 봤을 때 서양식으로 직급과 연령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친구가 되지는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언어 파괴 현상이라는 비판 목소리도 있다. 국어학자 경북대 이상규 교수(전 국립국어원장)는 "연령, 밀접한 정(情), 동질성 같은 우리말의 친구에 전제되는 가치가 무너진 채, 친구의 의미가 그저 '끼리 집단'으로 변질되는 건 아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