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꿈으로 흐른 3월의 강

죽장 2013. 2. 20. 13:31

꿈으로 흐른 3월의 강

- 견 일 영 -

 

꿈을 리얼하게 묘사한 것은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九雲夢)이다. 성진이 꿈과 세상을 서로 구별한 데 대하여 육관대사가 허망한 꿈과 참이 크게 보면 같은 것이라고 한 것이 이 소설의 주제가 된다. 구운몽의 내용을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종교적 코스모포리탄이즘으로 보는 것보다 초자연적 관조로 여기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고대광실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도 지나고 보면 다 일장춘몽인데, 3월은 행복의 가면을 쓰고 중생의 발등을 밟고 지나간다. 이 화려한 계절은 잠시 봄꿈으로 인간의 혼을 홀려놓고, 비굴하게 행복을 구걸하도록 만들어 놓는다.

 

호지에 무화초(胡地無花草)하니 춘래 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한 것도 단순한 화초 때문에 봄 같지 않다고 했겠는가. 진정한 봄 같은 마음이 없으니 봄이 아니라고 했겠다. 낙양의 고관대작, 돈 많은 호걸들도 가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 고뇌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슬프게 흐르는 3월의 강은 잔인하다 못해 허망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무상을 가장 절실하게 가르쳐 주는 계절이 3월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도 인간은 자꾸 가지려고 한다. 눈을 뜨면 사라지는 꿈을 안고 얼마나 욕심을 부리고 있는가. 잠을 깬 어린아이가 꿈속에 간직했던 예쁜 인형을 찾으며 울부짖는 모습을 어른들 세계에서 더 많이 본다.

 

햇살 바른 들판에 무진장 피어나는 봄꽃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그 꽃은 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그 꽃이 열흘을 넘기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가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옛날에 나와 함께 근무했던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40여 년 전의 목소리로 그동안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고 엄살을 뜬다. 그는 느닷없이 그와 한 방에서 같이 하숙했던 여인의 안부를 묻는다. 그 물음 속에는 내가 그를 무척 좋아했는데 지금도 무슨 내왕이나 있는가 싶어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증이 솟아오른다. 몇 년을 함께 근무했던 그 여인은 어느 날 나를 조심스레 사무실 밖으로 불러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제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얼떨결에 황급히 대답했다.

“예예...축하합니다.”

나는 닭 쫓던 개가 되어 한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날부터 의도적으로 그의 소식을 외면했다.

 

40여 년이 지났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가 부질없이 내 마음을 충동질 한다. 대학 동창회 명부를 뒤졌다. 그는 과가 다른 1년 후배였다. 근 3천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명부 속에서 그의 이름을 간신히 찾아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의 주소와 전화 번호 난을 보았다. 아니, 그 자리에 ‘작고’라는 두 글자가 비목으로 박혀 있지 않은가.

 

그의 젊은 시절, 모두가 탐을 내던 그 우아한 얼굴이 백골이 되다니. 전화를 한 서울의 그의 친구가 더 놀란다. 조금 있으니 서울서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그가 알아보니 8선녀보다 더 예뻤던 그가 딸만 다섯을 낳고 회갑 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꿈 같은 젊은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와 아무 연관성도 없는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가 떠오른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부끄럽게도 잔을 잡을 만큼 깊은 인연이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이미 허무한 봄의 영상이 낡은 흑백 영화로 변하여 어디 흔적이나 남아 있는가. 이제 그의 영상은 너무 낡아 스크린에는 비가 줄줄 새고 있다. 옛날 아름답게 모자이크된 그의 얼굴은 긴 세월의 풍우에 모두 떨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봄을 누가 아름답다 했는가. 60 고개도 넘지 못한 그 여인은 봄을 얼마나 저주했겠는가. 그는 3월에 혼인을 하고 3월에 전근을 가면서 헤어졌다. 그리고 영영 소식이 끊어졌다. 우연히도 반세기가 지난 입춘 날에 그의 허무한 소식을 들었다.

 

3월의 강은 꿈 같이 흐른다. 일도창해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한 바가지 물로 그냥 흘러 흘러가고 있다. 그것은 모두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진다. 욕망도 고뇌도 다 휩쓸어 꿈 같은 3월이 강으로 흐르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말이 무거운 짐으로 내 가슴을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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