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4, 조선일보]
아이들의 삶도 가볍지 않다
"울보 외손녀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서울 떠나려던 노후 생활도 포기
육아전쟁 속 커가는 모습에 행복… 초등 3학년, 난데없는 ‘가출 소동’
빡빡한 일과로 스트레스 받았나 날개 펴고 창공을 훨훨 날았으면"
- 임채수 / 청소년자연과하나되기연구원장
딸네 집은 우리 집과 직선거리로 200여m 거리이지만 외손녀 혼자서 외가를 오간 일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는 그날 겁이 났던지 온통 눈물과 땀투성이였다. 대충 씻기고 진정시킨 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엄마와 화해시키는 자리에서는 우리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다더냐?"는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가출 소동이 꼭 정해진 학교 일과나 방과 후 과외 활동 때문만은 아닌 듯하지만, 아이의 일과가 제 의지대로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해 볼 시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족들이 기울이는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외손녀는 그래도 여느 맞벌이 자녀보다는 여건이 좀 나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부모는 주말에는 다른 일을 제쳐놓고 야외 자연을 찾아 아이와 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외손녀라면 껌뻑 죽는 외조부모가 성심으로 돕고 있음에도 아이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엄마 품에서 응석이나 부릴 나이인 생후 14개월 무렵부터 어린이집에 맡겼던 것이 불만으로 쌓인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처방은 그래도 내리사랑뿐임을 다시 깨닫는다. 어른들의 삶이 날로 팍팍해지면서 자녀 양육문제도 어려워진 느낌이고, 어린아이라 해서 삶의 무게가 가볍고 즐거운 것만은 아닌 것이 현실이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혈손(血孫)으로 하나뿐인 외손녀를 나는 나만의 애칭인 '솔이'로 부른다. 10년 전 아이의 출생소식을 전해들었던 곳이 경북 울진 소광리 숲이었고, 그곳 울울창창한 소나무의 기상을 닮아주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았다. 외손녀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퇴직 후 은거 중인 내 일상에서 특별한 감동이자 기쁨이었다. 그 아이는 갓난아기 때는 돌보기 힘든 울보 떼보였다. 백일을 맞기까지 별났던 기질이 지금도 생생한데, 시도 때도 없이 우렁차게(!) 울어대는 바람에 제 엄마를 힘들게 했다. 한 시간 이상 자는 일이 드물게 자주 깨어나 우는 바람에 다른 신생아들을 깨워 보육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기가 일쑤였다.
어려서도 마치 역마살이 낀 듯 바깥나들이에 관심이 많아 물놀이 전날이면 미리 수영복을 입고 잠자리에 들고, 김밥 같은 준비물에 차질이 없도록 두 번 세 번 엄마에게 다짐을 받던 아이였다. 치카치카(양치질) 후에는 좋아하는 요구르트조차 "안 먹겠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바람에 간식을 내민 외할머니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소아과 의사가 진료를 끝내고 나면 주던 사탕을 어느 날엔 주지 않자, 의사를 빤히 쳐다보며 손을 내밀어 두 배로 사탕을 받아내던 '약속과 규칙'에 충실한 녀석이다. 엄마 아빠의 말다툼 끝에 엄마로부터 한 마디 핀잔을 듣고는 제 아빠를 향해 "아빠! 왜 저 여자와 결혼했어?"라고 일갈해 부부싸움을 끝내게 하던 놈이다.
아이는 5년 동안이나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가끔 '등원 거부'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또래들과도 비교적 잘 어울렸다. 어린이집 생활 초기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들어온 문의 문고리를 잡고 서 있을 때가 많았다는 말을 듣거나, 일과가 끝나 집으로 데려올 때 얼마나 울었는지 쉰 목소리를 내는 아이를 맞아 목울대가 뜨거워지던 때도 있었지만 어린이집에 익숙해지고는 그야말로 일취월장하던 아이다.
아이 때문에 우리 부부의 일상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서울을 떠나 노후 생활을 하기로 하고 시골에 거처까지 마련했지만 외손녀가 생기자 아내가 "아이를 가까이서 보지 않고는 살 수 없다"며 귀향을 거부하는 바람에 계획을 접어야 했고, 식탁 대화는 대부분이 외손녀의 '동향'에 관한 것이 됐다. 아이가 제법 굵고 긴 황금색 똥을 눈 것을 보면서 부부가 함께 크게 함박웃음을 터뜨린 일이 생각난다.
이처럼 치열한 육아전쟁 시대에 늘 맑고 밝은 웃음 속에 커가는 외손녀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껴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지금은 나의 두 딸을 키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편리한 육아용품들이 개발됐고, 나아진 주거 환경과 탁아 시설의 도움을 받고 있어도 오히려 육아의 어려움은 더해진 느낌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틀에 갇혀 창공을 훨훨 날지 못하고 서툰 날갯짓으로 푸득거리는 어린 영혼의 면면을 대할 때마다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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