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8.21, 조선일보]
이공계 실험실에는 국경이 없다
논설위원 김형기
서울대가 중국·몽골·베트남·미얀마 등 개발도상국의 우수 학생 332명을 파격적인 장학혜택을 주고 유치했다. 대다수가 대학원생(석사 188명, 박사 71명)이다. 서울대는 이들에게 생활비와 항공료까지 합쳐 연간 2500만원씩 지원할 계획이다.
서울대는 이들을 데려오려고 봄부터 아시아 각국을 돌며 설명회를 열었다. 특히 공대와 자연대가 공을 많이 들였다. 국내 우수 인재들은 의학·약학 대학원이나 외국 유학으로 다 빠져나가니 실험실을 꾸려나가려면 다른 방도가 없다.
서울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른바 '1부리그' 대학의 대학원은 '2부리그' 대학 졸업생과 외국인 유학생이 채우고, '2부리그' 대학의 대학원은 그다음 대학 출신과 유학생이 채우는 피라미드 구조가 전국적 현상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이공계 대학원생과 교수의 관계는 동업자에 가깝다. 교수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실험을 하고, 논문을 생산하고, 그렇게 해서 그 교수가 이끄는 연구실의 평판을 높이는 게 대학원생의 역할이다. 일류 대학원생 없는 일류 교수는 존재하기 힘든 세계가 이공계다. 그런데 똑똑한 인재들이 너도나도 의사만 되겠다 하고, 학자 지망생마저 국내 대학을 외면하고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 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스위스 IMD가 발표하는 세계경쟁력지표 중에 '두뇌유출지수(BDI·Brain Drain Index)'가 있다. 10이면 모든 두뇌가 자기 나라에 남아있으려 하는 것이고 1이면 다 떠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2011년 기준 한국의 BDI는 3.68로 전체 59개국 가운데 44위다. 노르웨이가 1위(7.86), 스위스가 2위(7.41), 미국이 5위(7.15)다. 이런 나라들이야 그렇다 치고, 칠레(3위)·체코(10위)·인도(12위) 같은 나라보다 우리의 두뇌 유출이 극심한 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두뇌 유출은 국가의 지적(知的) 생산력 저하로 직결된다. 세계 유명 학술지에 실린 국가별 논문의 영향력 지수에서 한국은 0.933으로 세계 평균(1.0)에 밑돌 뿐 아니라 중국(0.942)보다도 낮다. 서울대 역시 논문 숫자는 적지 않지만 질(0.970)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공계 기피를 개탄만 하고 있어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선진국들도 다 있다. 인재가 빠져나가는 걸 애국심이나 사명감만으로 붙들 수 있는 시절은 갔다. 이공계 문제도 냉정한 인력의 덧셈-뺄셈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리 두뇌가 빠져나가면 그만큼을 바깥에서 들여와 맞추면 된다. 우리 이공계에 2014년까지 박사급 인력 3100명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 갭을 메우려면 국가나 인종 가림 없이 우수한 인재를 뽑아오고, 우리나라를 빠져나가려 하는 인재들을 최대한 붙드는 수밖에 없다. 과학자에게는 국적이 있지만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자면 결국 돈이 문제다. 미국 대학이 세계의 두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해외 두뇌들이 학비나 생활비 걱정 없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여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부나 대학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미국에선 기업이 그 역할을 한다. 대학에서 기르는 인재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기업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이 30.5%로 미국(12.7%)의 갑절이 넘고 중국(40.7%) 빼고는 세계 최고다. 이공계 인재 양성의 혜택을 어느 나라보다 많이 누리는 것이 한국 기업이다. 우리 기업들도 그 비용을 분담하겠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 대학이 세계의 인재를 불러 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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