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단상

'師弟 문화'가 쓰러지면

죽장 2011. 7. 13. 10:35

[2011.7.13 조선일보에서 퍼온 글]

'師弟 문화'가 쓰러지면

 

 

교육제도와 철학에서 한국만큼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도 드물다. 광복과 함께 미 군정이 들어와 미국식 교육정책을 이식(移植)했고, 1952년부터 1961년까지 활동한 미국교육사절단은 한국 공교육의 틀을 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절단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을 한 많은 학생과 교육자는 문교부(교육부) 장관, 교육관료, 대학교수가 돼 한국 교육을 이끌었다.

지금도 한국 교육계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 미국과 연관이 깊다.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해외 교육학 박사 1465명 중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76%(1117명)로 여타 분야 평균치 57%에 비해 눈에 띄게 높다. 서울대 교육학과는 교수 22명 중 20명이 미국 박사다. 미국에서 신종 학습이론이 나오면 이들을 통해 곧바로 한국에 소개되고 실험된다.

이런 두 나라가 흥미롭게도 일선 학교현장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다. 전체 초·중·고교생의 90%, 4900만명이 다니는 미국의 공립학교 시스템은 모든 선거에서 늘 1순위 현안일 만큼 국가적 골칫거리다. 반면 한국 학교는 그런 미국에 부러움의 대상이 돼 있다. 미국 학생들의 학력은 수십년간 OECD 하위권을 맴돌고 있고 학교는 제멋대로인 학생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폭력이나 절도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학교는 전체의 15%에 불과하며, 고교생의 7.8%가 무기를 지닌 다른 학생들로부터 위협을 받거나 다친 경험을 갖고 있다. 금속탐지기로 등교학생을 검사하는 학교가 20개 중 1개꼴이고 5개 중 1개는 마약 소지 불시조사를 벌인다.

미국 학교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20세기 초 불기 시작한 진보주의 교육 바람이 있다. 1919년 진보주의교육협회(PEA)를 결성한 교사와 교육학자들은 교사는 학생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촉진제 구실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충격으로 잠시 지식교육이 강조됐던 1960년대를 뺀 지난 세기 대부분 미국 교육은 진보주의자들이 끌어왔다. 그 결과 교사는 주어진 시간에 정해진 커리큘럼만 진행하면 그만인 기능인으로 내려앉았다. 아이들에 대한 끈끈한 애정은 고사하고 천방지축 나대는 아이들을 꾸짖을 힘도 의욕도 잃은 지 오래다. 미국 신임교사의 절반은 5년 안에 교직을 버리고 떠난다.

미국 교육사조(思潮)의 영향을 실시간으로 받는 한국 학교가 미국처럼 망가지지 않고 버텨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만의 독특한 '사제(師弟)문화'가 그중 한몫을 했음은 분명하다. 학생과 학부모는 스승을 존경하면서 어려워하고 스승은 제자를 아끼며 엄히 이끄는 수백년 문화가 우리 학교를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그 버팀목이 지금 무너지려 하고 있다. 몇몇 좌파 교육감들이 "학생이 무슨 짓을 해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는 미국식 진보 깃발을 들고 나오면서부터다. 교실의 질서와 평온은 급속히 깨져나가고 교단에는 무력감이 확산돼 "문제학생을 봐도 못 본 척한다"는 교사가 97%에 이르고 있다.

1841년 미국에 공립 초등학교를 처음 세운 호레이스 만은 "공립학교가 가진 모든 역량을 발휘하게 하라. 형사법이 규정하는 범죄의 90%가 사라질 것이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1998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교육위원회는 공립학교에 근무하는 경찰의 권총 소지를 허용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다잡지 않으면 우리도 머지않아 미국이 걸어온 그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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