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시계
견 일 영
소동파가 젊었을 때, 한간(韓幹)의 목마도를 보고 시를 지어 “한간이 그린 그림은 진짜 말 같다.”고 했다. 만년에 다시 이 그림을 대하고는 “이제 보니 말보다 금빛 안장이 먼저 눈에 띄네. 말의 본성은 뛰는 것인데......”
가난할 때는 말이 바로 보였는데 벼슬이 높아지고 넉넉해지니 보이는 시각이 달라졌다. 그 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기름기 도는 말보다는 생생한 풀을 뜯는 말이라야 말다운 것인데.” 그로부터 근 천년이 지났는데 그의 자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젊었을 때, 나는 아주 예쁜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첫사랑이었다. 내 눈에는 그의 인물이나 행동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숙집에서 눈만 뜨면 제일 먼저 그의 모습이 떠올랐고, 시간만 나면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와 영원히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예쁜 그의 모습은 가끔 꿈에 나타나 나를 울렸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고도 세월은 더 흘렀다. 그런데도 꿈속의 그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리움만 더했다.
어느 날, 참으로 우연히 멀리 있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모습은 지난(至難)한 세월에 찌들어 꿈속의 모습은 간곳이 없고, 그의 영혼도 각박한 세태에 물들어 티 한 점 찾아 볼 수 없던 순정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실망의 먹구름이 내 가슴을 덮었다. 그렇게 아름답던 꿈이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은 나의 눈이 염량세태에 물들어, 그의 본성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도 나를 보고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나는 그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만 무지했다. 금빛 안장도, 사랑했던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 다 사라진다. 모두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아닌가. 모든 것은 변하고 실체가 없거늘, 영원히 불변하며 실체가 있다고 착각한다. 고뇌는 이러한 집착에서 생긴다.
사랑이 지나간 빈자리를 아쉬워하며, 얼마나 괴로워하고 원망했던가. 이 모든 것이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허물은 숨기고 감쌌다. 누구나 사랑에는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진 예도 드물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사람도 드물다. 상대편 가슴의 고통이 얼마나 아픈 것인데 운명이란 변명과 추억이란 낭만으로 얼버무린다.
세월이 흐르고 자신이 외로워지면 지난날을 회상한다. 나이가 더 많아지고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되면 자신의 과오가 보이기 시작하고, 자성하게 된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이 그때 생겨나지만 때는 늦다. 진심으로 사과할 사람은 유성처럼 어디론가 떠나가고 없다.
시간은 모래시계 속에서 천천히 흘러내린다. 지나고 보면 빈 공간만 남는데 거기에 집착하여 얼마나 깊은 고뇌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던가. 빨리 달아나는 시간을 잡으려고 헛수고를 하고, 부정확한 실험에서 위험한 순간을 수없이 넘기고, 옳은 판단을 얻지 못하여 어렵게 방황한다.
헤어지던 날, 운명이란 단어에다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무책임한 말을 남긴 채 훌쩍 떠났다. 그때 에로스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채찍을 쥔 어떤 신도 눈을 감고 있었다. 내 죄는 용서를 비는 기도로써 덮어버리고, 그의 아픔은 아가페의 가면을 쓰고 외면했다. 나는 고해(苦海)라는 말로 된 방패 뒤에 숨었다.
달콤한 사랑은 추억이란 명칭으로 자리만 옮겨 놓고, 바람 빠진 풍선을 아무 곳에나 버렸다. 헤어짐이 남긴 한숨은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그 통증이 풀린 뒤에는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세계를 만나면 거기에 빠져 그것을 즐기기에 정신이 없었다.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을 무슨 지나가는 통과의식으로만 여기고 설한풍 속에 방황하는 카추샤를 못 본 체했다.
시간이란 노련한 청소부처럼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픔도 기쁨도 다 쓸어가 버린다. 영겁의 시간 속에 다 묻어버린다. 시계 속의 모래는 잘록한 유리병 허리를 간신히 빠져 밑으로 흘러내린다. 그 모래는 세월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모래는 자신이 시간이 되는 줄도 모르고, 세월은 모래와는 아무 상관없이 끝없이 흘러가기만 한다. 목을 벨 것 같던 나의 자성도 이 모래 속에 묻고, 나는 오늘 새로 뜨는 햇살을 받으며 천연덕스럽게 어디론가 또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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