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원고와 자료

애국가 대신 광부들의 울음소리가

죽장 2009. 12. 21. 16:38

1963년 8월 서독에 파견할 광부 260명의 모집공고가 났다. 서울에서만 원서가 4000여장이 나갔고 영어·국사 필기시험에 대비한 예상문제집이 나돌았다. 광부 1년 이상 경력증명서를 요구하자 서울시청 인근에 가짜 증명서를 파는 곳까지 등장했다. 대졸 응시자들은 면접장에 나오기 앞서 연탄에 손을 비벼 검고 투박한 손을 만들었다. 실업자가 250만명이나 되고 고학력 실업자들이 늘던 시절이었다.

▶경쟁을 뚫고 서독에 도착한 광부의 30%에서 서독에 없던 십이지장충이 발견돼 전원 귀국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행히 영국제 구충약이 효험을 봐 섭씨 32도 넘는 지하 1500m 막장에 투입됐다. 서양인 체격에 맞춘 크고 무거운 착암기가 힘에 부쳐 우는 이도 있었다. 작업환경이 너무 나쁘다고 했다가 "일하기 싫으면 한국에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광부들의 일터를 방문했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자 애국가 대신 광부들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고 대통령도 감정을 이기지 못해 연설문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광부들은 한 달 1400~1600마르크(당시 28만~32만원)를 받아 방값·식대 빼고 1000마르크쯤을 손에 쥐었고, 평균 800마르크를 고국 가족에게 보냈다. 쉬는 날엔 인근 식당에서 감자 깎기를 하고 탄광 일이 끝난 뒤 모래채취장에서 일해 송금액을 더 늘린 이도 많았다.

독일에 정착한 광부들의 모임 '재독 한인 글뤽 아우프(Gluck auf·행운을 빈다는 뜻의 광부들의 인삿말)회'가 지난주 독일 에센에 파독 광부 기념회관을 세웠다. 광부들이 일하면서 적립했다 찾아가지 않았던 퇴직 연금이 회관 종자돈이 됐다. 우리 정부는 독일 정부가 보내온 연금의 주인을 수소문해 돌려줬고 주인을 못 찾은 돈에 3억원을 보태 20억원을 건립비로 보냈다.

▶1963년부터 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 7936명과 간호사들이 보내온 돈은 1억153만달러였다. 수출액 2%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오늘 21일은 파독 광부 1진 123명이 독일로 떠났던 날이다. 이들이 라인강에 뿌린 피땀은 가족의 삶과 나라 경제의 밑바탕이 됐다. 독일 살던 광부 중에 70~80대가 돼 돌아오는 이가 적지 않다. 여생을 보낼 터전으로 남해와 당진에 '독일마을'도 생겼다. 인생이 저물어 갈수록 고국이 그리울 것이다. 나라가 그들을 위로하고 보답할 방법을 찾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