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교육 관련 자료

商山便紙抄

죽장 2008. 3. 18. 11:18
[주] 2005.3.1~2006.2.28까지 상산전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할 시, 학생들에게 훈화로 들려준 1년간의 자료를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商山便紙抄


1. 만남

 새 학년도가 시작하는 날 봄눈이 내렸습니다. 눈은 제법 내려 땅도 덮고 나무도 덮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들 마음도 덮고 말았습니다. 그날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눈처럼 희고 맑은 마음으로 상산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작과 출발은 희망이고 축복입니다. 더구나, 대지에 싹을 틔우고 잎을 피우라고 봄눈까지 내린 날 함께 시작할 수 있어 얼마나 좋습니까. 축복하고 축복받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입니까. 상산인들이여! 앞으로, 미래로 나아갑시다.


2. 출발

 오늘, 152명 신입생이 입학을 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고등학교 시절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나의 발전은 물론이고 내 이웃의 발전까지도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공학도로서의 긍지와, 사명감 그리고 자부심입니다.

 출발하면서 우리의 명예를 스스로 지키려는 마음으로 두가지만 다짐합시다. 그 하나는, 예절을 지키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성실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전공분야의 첨단기술 연마에 정진하지는 것입니다.

 신입생 입학식을 하는 날, 우리 상산인 모두에게 가슴에 품은 꿈의 성취를 위하여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합니다.


3. 행복한 아침

 3월이 봄이라지만 아직은 아침 기온이 제법 쌀쌀합니다. 그래도 우리 상산인들은 시간을 재촉하며 서둘러 등교합니다. 교문을 들어서서 언덕길을 힘차게 뛰어 오릅니다.

 길 양편에 떨어져 있는 휴지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투어 주워들고 교실로 향합니다. 그 마음이 아침공기처럼 신선합니다. 깨끗한 환경은 마음까지 맑게 해줍니다. 버리지 않는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깨끗한 환경은 우리들의 미래입니다.

 3월의 바람은 이제 곧 꽃내음을 실어 올 것입니다.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맑고 고운 마음을 지닌 상산인들은 행복합니다.


4. 경칩 백설

 우수·경칩 지나면 개구리가 겨울잠을 깨고 나온다고 했지요. 계절은 온전히 봄이라는 말입니다. 어제는 눈이 많이 왔습니다. 겨울 내내 오지 않던 눈이 오니 동심으로 돌아가 기쁘기는 합니다만 오는 봄을 기다리며 준비해온 계획에 작은 차질이라도 있을까 걱정입니다.

 일요일 아침, 다행히 날씨가 포근합니다. 쌓인 눈이 다 녹았습니다. 월요일이 기다려집니다. 새 학년도의 첫 주일을 보내고 난 후 씩씩하게 등교할 상산인들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눈 녹은 물이 자양분이 되어 언 땅을 헤치고 새싹이 올라오겠지요. 새로운 각오로 맞이한 새 학년, 새 학교가 여러분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줄 것입니다.


5. 꽃 소식

 며칠 전, 텔레비젼 화면에 제주도 유채꽃이 노랗게 피더니 오늘 아침엔 매화가 피었습니다. 전라남도 광양군 다합면의 소식이지요. 추운 계절을 이기고 눈 속에 피는 매화는 정절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향기가 아주 짙습니다. 지난해 마신 매화차가 생각납니다.

 상산에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꽃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꿈틀거리는 봄기운이 상산인들의 가슴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산수유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기다려집니다. 상산의 꽃 소식에 가슴에 설레입니다. 꽃 소식을 전합니다.


6. 봄은 안개처럼

 아침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바깥으로 나갑니다. 내가 가는 곳은 사택 가까이 있는 북천변입니다. 나 말고도 먼저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도 무리에 끼어 아무 생각 않고 걷습니다. 느리게도 말고, 너무 빨리도 말고 그냥 걷습니다. 내 목적지 중간쯤이면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반환점을 돌아 집에 오면 내 아침 걷기는 끝이 납니다.

 오늘 아침공기는 얼마나 포근한지 모릅니다. 뒷산을 내려온 안개가 시야를 가립니다. 안개가 다리를 휘감습니다. 봄 안개로 가슴속을 채웁니다. 안개를 헤치고 걸어가면서 하루 일을 생각해봅니다. 봄을 맞을 채비가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 다가오는 봄은 하나의 큰 의미입니다


7. 봄이 오는 바다

 어제 일요일에는 마산엘 다녀왔습니다. '상산사람' 아홉이 갔었습니다. 마산바람이 따스했습니다. 봄이 와있는 듯 했습니다. 불어오는 갯내음도 덩달아 시원했습니다.

 우리들은 돛섬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습니다. 방파제 끝에 빠알간 등대가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바다에 떼 지어 앉아 있는 흰갈매기 옆으로 컨테이너선이 수출품을 싣고 먼 바다로 향하고 있습니다. 노을이 밀려오는 바닷가 갈매기 날아오르니 물결이 일렁입니다. 멀리 퍼져나가는 고동소리는 희망입니다

 봄이란 계절이 희망처럼 머물고 있는 마산 앞바다. 가까이 보이는 그 바다가 좋았고 함께 갔다가 함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바다만큼이나 좋습니다.


8. 동백꽃

 지난 해, 동백을 보러갔던 그날은 찬비가 추적거리며 내렸습니다. 웅크린 채 봄을 기다렸건만 봄은 호락호락 오지 않았습니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오는 봄을 맞으려고 나섰던 겁니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여수를 지나 향일암으로 향하는 길에 말로만 듣던 돌산 갓김치 맛까지 보면서 동백을 향해 달려가는 급한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아, 마침내 당도한 그곳엔 때맞춰 피어난 동백이 잔치판을 벌려놓고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가리는 동백나무가 정열처럼 붉은 꽃을 달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답지 않게 동백에 취해 있는 나를,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구름인 듯 피어오르는 안개가 가끔씩 숨겨주었습니다. 내 몸뚱이도 그냥 하나의 풍경인 듯 했습니다.

 오늘 아침 남녘에 동백꽃이 만발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날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사람, 함께 있으면 더욱 좋은 사람과 함께 동백도 보고, 봄도 보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9. 봄비

 밤부터 내리고 있는 봄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줄 모릅니다. 빗물은 학교언덕 벚꽃나무를 흠뻑 적시고 있습니다. 잔디밭에도 넉넉하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제 봄비 그치고 맑은 태양이 저들에게 다가가면 연분홍 꽃망울을 밀어 올리겠지요. 파란 잔디가 돋아날 것입니다.

 봄은 이렇게 우리들 곁을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 하염없이 내리는 봄비를 보면서 성큼 다가온 봄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사실 상산의 봄은 벌써 와 있었답니다.

 3월에 되어 진급을 하여 학년이 바뀌었거나 입학을 하면서 상산의 봄은 시작되었습니다. 새 학교, 새 학년에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어른들을 공경해야겠다. 희망을 가꾸어야겠다 등등의 마음가짐은 봄이라는 계절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생각들입니다. 기왕에 맞이한 봄이고, 기왕에 내린 봄비이니 우리 봄을 정성껏 가꾸어 나갑시다.


10. 자존심

 우리 인사를 합시다. 학교의 선생님께, 집안의 어른에게, 방문하는 손님에게 열심히 인사를 합시다. 친구들 상호간에도 인사를 합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표정으로 인사합시다.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합시다. 명랑하고 큰소리로 "안녕하십니까?" 하면서 인사합시다. 인사는 진정한 마음으로, 정중하게, 상대방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르게 해야 합니다.

 명랑하게 인사를 하면 하루가 즐겁습니다. 마음을 열고 웃으면서 상대방에게 다가갑시다. 인사하는 내 모습은 나의 인격이고, 나의 자존심입니다.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그 집안, 그 학교의 됨됨이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을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즐겁게 주고받는 인사를 통하여 상산인들의 자존심을 살려 나갑시다. 우리 모두 인사를 잘 합시다.


11. 금연선포

 오늘은 상산인들이 금연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남에게 보이는 일임과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서약이기도 합니다.

담배의 해악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나 한번 습관화된 행동을 변화시키기란 결코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것은 인생항로의 목적지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더구나 학창시절에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면 영원히 힘들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2학년의 어떤 학급은 담배를 피우는 학생이 한명도 없답니다. 이런 학급이 자꾸만 늘어났으면 합니다. 오늘 금연선포식을 하고나면 이런 학급이 늘어나서 곧 완전금연학교를 선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담배 피우는 학생이 한명도 없는 상산전자공고!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자랑이 되게 합시다.


12. 칭찬

 칭찬은 듣는 이의 기분을 자극하여 의욕을 생기게도 해줍니다. 친구를, 동료를, 이웃을 많이많이 칭찬합시다. 칭찬받을 일을 하였다는 말을 듣는 본인은 물론이고 남을 칭찬하는 나도 즐겁습니다. 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뿐 아니라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어 내가 즐겁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칭찬해 줄 수 있어서 좋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누군가를 더 많이 칭찬합시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칭찬꺼리를 찾아봅시다. 남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행한 미덕이 있는지 찾아봅시다.

 우리학교 칭찬게시판이 칭찬하는 글들로 넘쳐났으면 합니다. 칭찬이야말로 사회를 맑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칭찬받을 일을 많이 합시다. 칭찬꺼리를 찾아봅시다.


13. 벚꽃소식

 상산언덕에 벚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아주 따스했던 지난 며칠사이에 벌어진 갑작스런 상황입니다. 이 성대한 꽃들의 잔치가 자못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학교후문에서 올라오는 길 양편에 흐드러진 개나라는 또 어쩝니까.

 상산교에서 후천교를 거쳐 북천교에 이르는 강뚝에도 벚꽃은 지천으로 피어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벌개미취 같은 들꽃들도 새움을 밀어올리고 있습니다. 강가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 상산언덕은 꽃대궐입니다.

 꽃그늘에 앉아 하늘을 바라봅니다. 향기 머금은 봄바람을 마십니다. 상산인의 미래가 꽃처럼 피어나고 높은 이상이 꿈틀거리며 일어섭니다. 우리들은 저 벚꽃을 바라보며 낭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젊은 청춘의 그림을 그립니다. 꽃 속에서 부르는 당신의 노래는 미래이며, 이상이며 낭만이고 청춘입니다. 벚꽃 핀 상산언덕에서 우리들만의 소박한 꿈을 피워봅시다.

 여기, 사월이 오기 무섭게 성큼 다가온 꽃소식을 전합니다. 만발한 꽃 속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꽃비

 꽃비를 아십니까? 상산의 꽃비를-.

 지금 꽃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색깔은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이고요. 크기는 손톱만 하답니다. 양은 얼마나 되느냐고요? 때맞춰 불어오는 봄바람 따라 하나둘 내립니다. 때로는 소나기처럼 쏟아집니다. 방향은 자기 마음대로지요. 이리 저리로.

 아이들 둘이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소녀의 마음 소녀의 꿈이 꽃잎으로 날고 있습니다. 꽃비에는 옷이 젖지 않고 마음이 젖는답니다, 연분홍색으로. 상산언덕에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러 오지 않겠습니까.


15. 용기

 누군가가 "차라리 희망을 버릴지언정 용기마져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희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용기라는 말입니다. 가끔 용기가 부족한 학생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인사를 하긴 해야겠는데 용기가 나질 않아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하거나,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에서는 '인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있는데 입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있음입니다. 수줍고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겠지만,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가슴을 펴고,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주시하며 입을 크게 벌려서 "안녕하십니까?" 라고 합시다.

 미래에 도전하는 학생, 어떤 일이나 정성을 다하는 학생, 어려운 일도 최선을 다하는 학생.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나아가는 학생, 이 모두 용기 있는 자의 표상입니다.


16. 작은 행복

 학교에 피는 벚꽃도 만개하는 때가 각각인가 봅니다. 교사 남쪽 편에 있는 30년생 벚나무들이 온통 꽃대궐을 이룬 후 눈송이처럼 낙화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었는데 이번에는 운동장 쪽의 벚나무가 또 야단입니다. 흰색에 가까운 분홍과 분홍에 가까운 흰색이 교대로 있습니다. 아주 진한 놈은 꽃잎이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살며시 다가갔습니다.

 그들은 외롭지 않아보였습니다. 봄바람도 함께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벌들이 온통 달라붙어 역사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내 귀에는 윙윙거리는 벌들의 소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내 눈에는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눈부시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상큼한 봄바람이 빈 가슴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누구 나에게 4월의 노래를 들려주지 않으시렵니까? 눈 감고 있는 난 행복합니다.


17. 시험

 삶은 시험과 시험의 연속입니다. 오죽하면 시험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나도 학창시절에는 연이어 닥쳐오는 시험에 시달리고 성적으로 인한 강박관념에 힘들어하면서 언제쯤 시험이 끝날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그때부터 시험에서 벗어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직장에 나가니 오히려 더 가혹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각종 연수나 승진이 모두 시험과 관련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보는 시험보다 철저했습니다. 삶 그 자체이었으니까요. 생존을 위한 치열함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시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인생과 시험은 결코 뗄 수 없는 명제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시험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시험과 함께 살면서, 시험을 즐겨야지 하는 생각으로 돌렸습니다.

 우리, 시험에 최선을 다하면서 시험을 즐깁시다. 시험으로부터 놓여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18. 소풍가는 날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가 아침이 되어도 그치질 않습니다. 그래도 출발해야겠지요. 나도 덩달아 소풍가는 날의 설레는 마음을 회상해 봅니다.

 몇 녀석들이 지각했다고 주의도 듣고, 몇 녀석들은 옷이 너무 야(?)하다고 주의를 듣고, 마지막까지 보이질 않는 놈들에게는 전화를 하여 확인하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고서야 에버랜드 행 버스 열대는 출발했습니다.

 여전히 봄비가 내리고 있는 교정에 푸른 붓꽃이 비를 맞고 서있습니다. 청초하달까요, 청순하다고 할까요. 하여간 나와 함께 종일동안 학교를 지킬 참입니다.


19. 어머니 생각

 어제는 대전에 살고 계시는 누님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가장 닮은 유일한 분이 바로 내 누님이십니다. 크지 않은 키에 약간은 좋은 몸매, 적당하게 주름진 얼굴, 인자한 눈길에 다정한 미소, 그리고 거칠고 험한 손까지 누님은 어머니를 꼭 닮았습니다.

 어버이날에 부모님이 모두 계시질 않으니 누님을 만나 얘기도 하며 어머니를 회상하였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누님께서도 멀리서 장성한 동생이 찾아왔으니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6.25때 피난 갔던 일이며, 어머니를 도와서 울보 동생이었던 나를 많이도 업어 주었다는 얘기는 들을 때마다 감동적입니다. 나에게 이렇게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님 한 분 뿐입니다.

 누님은 빽밀러에 비취는 영상이 까마득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그 자리에 서계십니다. 그 모습이 그만 보기 싫어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았습니다. 누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눈에 뭣이 들어갔는지 눈물이 빙그레 돕니다. 공연히-.


20. 초대

 우리 정원에 봄소식을 먼저 전해 주는 것은 포근해지는 봄볕도 아니고 짝을 찾는 새소리도 아니고 가끔씩 날아오는 나비들의 춤도 아닙니다. 그것은 꽃들입니다.

 민들레가 피고, 제비꽃이 피었습니다. 백목련이 피고, 할미꽃이 피었습니다. 영산홍이 피고,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또, 보랏빛 매발톱의 뒤를 따라, 붉은 매발톱이 꽃을 피웠습니다. 라일락이 피고, 금낭화가 피었습니다. 금년에 심은 모란은 흰꽃을 보여주었는데, 지금은 은방울꽃이 한창이고 타래붓꽃이 한창입니다. 둥굴레도 꽃을 피웠고, 산더덕도 향기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담장아래 돌나물이 자라고 도라지가 자라고 있습니다. 얕은 담장으로는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한번 와보세요. 이제 곧 줄장미가 피고, 감꽃이 필 것입니다. 백합이 질세라 따라 피면 우리 마당엔 꽃향기가 진동하고 꽃그늘 짙어지면 성큼 여름이 다가올 것입니다.

 서늘한 바람 부는 저녁이면 잔디밭 귀퉁이 바윗돌은 더욱 시원하답니다. 특별히 당신을 기다리는 그 자리에 6각형 램프까지 밝혀 두겠습니다. 황촛불 흔들리는 그 모습에 넋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개구리소리를 안주삼아 두 손으로 받쳐 든 찻잔에 별떨기라도 담겨지면 두 눈을 살며시 감아도 좋습니다. 입맞춤시간이니까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21. 부끄럽다

 매년 5월 15일로 정해진 스승의 날을 교사의 날로 하자거나 아예 폐지하자는 말까지 들립니다.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어김없이 촌지에 대한 듣기 거북한 말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더러는 스승의 날 학부모들의 학교방문을 사절한다는 입간판을 세운 학교도 있습니다. 또, 공개된 장소에서의 꽃다발은 괜찮고 포장된 어떤 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금년의 스승의 날이 마침 일요일인지라 오늘 아침 학급별로 스승의 날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는 마음,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하고 목청을 높이는 마음들이 계절의 여왕 5월만큼 예쁩니다.

 조용히 생각해봅니다. 나 역시 교단에 선 사람의 하나로서 정말로 하늘만큼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 아니면 지금 베풀고 있는가를-.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습니다. 난 비록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을지언정 학생들에게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제일이라면, 가르침으로 인간이 되게 해주신 스승의 은혜는 제이쯤이라 하고 싶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고마움을 망각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선생님들의 의무입니다. 누가 뭐래도 은혜를 아는 사람이 참사람 아니겠습니까. 나처럼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22. 친구

 여러분은 친구가 몇 명이나 됩니까? 여기서 친구라 함은 정말로 진정한 친구를 말합니다.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보통의 친구도 있느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어려움, 괴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고 즐거움, 기쁨을 함께 할 사람. 슬픔의 눈물이 나거나 빵이 생겨 즐거울 때도 나눠먹고 싶은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 생각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더러는 없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은 보통의 친구이겠지요.

 이제 다시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느냐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한 학급의 동료가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하는 경쟁의 상대자로 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필요합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해가는 현실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공주, 왕자로 성장하는 오늘 날 내가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래도록 만나지 않고 무소식으로 있다가 갑자기 만나도 지난번 헤어질 때 나누던 대화가 연이어지는 사람.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긴하게 부탁할 일이 없는데도 '그냥'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좋습니다. 오늘은 친구가 환한 얼굴을 하고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날입니다


23. 습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들 합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알리겠습니까? 내 자신을 알릴만한 특출한 능력이 있습니까? 윗사람이나 동료들이 나를 알아줄 때 느끼는 짜릿함을 맛보려면 뭔가 내세울 것이 있어야 합니다.

 '훌륭한 학생'. 말만 들어도 가슴이 뿌듯하지 않습니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중의 하나로 '좋은 습관'을 들고 싶습니다. 호기심, 탐구력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보다 쉬운 길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는 일입니다.

 어떤 행동이 습관이 되면 사람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나에게 필요한 좋은 습관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습관적인 내 행동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됩니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남에게 나를 알리는 최선의 길입니다


24. 비젼

 이번 편지는 선생님들에게 더 어울리는 내용입니다. 아니 교장에게 더 필요한 말입니다. 학교라는 조직도 의인화되어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는 인간의 욕망을 결합시켜서 새로운 제품(학생)과 서비스(교육)를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학교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구체화하고 가치를 결정하며 생산요소(교수-학습방법)를 결합시켜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이 고객(학생, 학부모)으로부터 멀어지는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달궈내지 못하면 좋은 관리자도, 좋은 교사도 아닙니다. 통제가 관리의 중요한 기능이었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복종이 모든 것이든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관리자들은 수직적 구조에서 벗어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유연성이 창의력과 자율성의 기본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창의성과 자율성이 살아나려면 정신이 자유로워야 하고 실패와 실수가 긍정적인 실험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선생님들이 하는 업무의 목표는 고객입니다. 고객에게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행복한 교사는 행복한 고객을 만들어 줍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젼입니다. 학생들은 비젼있는 목표로 향하는 중간지점에 서있고 이 지점을 성공적으로 통과시켜 주어야 하겠습니다. 비젼이 있어야 먼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 비젼을 수시로 확인시켜줘야 최선을 다해 배울 수 있습니다. 고객에게 비젼을 주고 비젼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교사들의 비즈니스입니다


25. 철쭉

 소백산철쭉제를 한다기에 한달음에 갔습니다. '철쭉제'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소백산 가까이 있는 '영주'에 근무할 때이니, 20년도 더 전입니다. 철쭉제에 두 사람을 초대했었습니다. 그날 소백산 연화봉에 만발한 철쭉이 너무 좋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왔었던 동료 두 사람 중 한명은 그날로부터 몇 년 후 교통사고로 멀리 갔습니다. 또 한사람은 중풍으로 인하여 큰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졸작 "철쭉꽃"이 탄생되었으며, 우리 마당에 철쭉을 많이 심은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해마다 철쭉꽃을 보면서 그때 일을 추억하고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나에게 있어 철쭉이나, 철쭉제는 특별한 의미입니다.

 올해는 비로봉을 선택하여 올라갔습니다. 철쭉은 정상부근에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기는커녕 전신을 흔들며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소백산 철쭉꽃, 참 좋았습니다.


26. 얘들아, 잘들 있느냐

 너희들을 보지 못한 기간이 이제 겨우 2주일인데, 안부가 궁금하구나. 지금 생각해 보건데, 방학을 앞에 두고 기다리면서 기쁨으로 채워진 너희들의 표정과는 달리 내 가슴 속에는 걱정이 스물거리며 자라고 있었다.

 마침내 방학을 하는 날, 환호성을 지르며 교문을 뛰어나가던 너희들의 뒷꼭지를 바라보면서 내 걱정의 끈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지만,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무력감이 나를 안타깝게 했었다.

 애들아, 이제 다소 안정된 마음이 되니 욕심이 나는구나. 이번 방학동안에 들판에서 자라고 있는 풀이나 꽃, 뛰고 있는 벌레들과 친해지면서 자연을 배워오너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랑을 배워오너라. 친구와 이웃, 그리고 어른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인간으로서 알아야할 예의와 예절을 배워오너라.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면 너희들은 다시 공부로 바빠지겠지.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며, 친구들과는 피 말리는 경쟁을 하겠지. 그러니 이 방학기간이 아니고는 자연을 접하거나, 사랑을 배울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란 얘기야.

 이제 다시 노파심의 끈을 집어 들고 부탁한다. 남은 방학기간도 건강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있다가 오라고 한 말 잊지 말아라. 이 더운 여름이 가고나면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이 되어 보란 듯이 나타날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으마.


27. 물결 따라 흔들리는 배

 얼마 전, 복장을 지도하는 선생님에게 머리를 한대 쥐어 박힌 학생이 휴대폰으로 폭력교사라며 경찰에 신고를 했고, 연락을 받은 학부모는 한발 더 나아가 진단서를 끊어 폭력교사를 고발하겠다며 펄펄 뛴 적이 있었습니다. 학부모들의 목소리와 학생들의 항변이 교육전문가인 교사들의 의지를 초월하고 있다. 수요자의 바람직한 의견을 존중하는 정도를 넘어서 학교가 눈치를 봐야하거나 교육이 원칙 없는 큰 목소리에 좌지우지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내 자식 잘 가르쳐 달라며 학부모가 선생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풍경은 아득한 옛일입니다. 툭하면 촌지 받는 집단이라며 동네북처럼 얻어맞은 것이 한 두 번입니까. 학부모나 사회일반이 교사를 경시하고 있는 현실에 학생들이 선생님을 존경할 턱이 없습니다. 존경받는다고 배부른 것도 아닌데 하며 자조하고 있는 교사들은 언제부터인가 자긍심으로 채워진 스승이 아니라 호구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월급쟁이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생활화되면서 자신의 의견을 게시판에 올릴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지나쳐서 순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사소한 문제도 인터넷에 올려 일을 크게 벌이면 해결이 수월하다는 풍조가 함께 확산되고 있는 현실이 걱정입니다.

 어찌되었거나 지금은 목소리 큰 사람을 돌아보는 시대이고, 내 주변의 누구보다도 내가 잘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존경받는 학교가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의 교육적 소신이 위축되는 현실입니다. 교육에 있어 모두가 전문가로 자처하면서 큰 목소리로 학교를 흔들어대니 교육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교사들의 마음이 흔들려서야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흔들리는 물결에 배도 따라 흔들리고 있는 꼴이지요.


28. 소쩍새 울음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보다’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주절거리며 다닌 세월이었다. 봄부터 업무를 분장하여 활동을 하였으며, 드디어 국화가 활짝 핀 가을이 된 것이다. 11월 들어서면서 모두가 상당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가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결과를 중간점검 하는 회의도 잦아졌다.

 1차 점검 결과 상당한 인원이 초과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 숫자에서 몇 명이라도 증가하면 했지 절대로 줄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흘렀다. 학교로 봐서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달교에서 넘치는 학교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한 장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하여 간곡하게 설명하던 처음의 입장이 바뀌어 다음 순간에는 단 몇 장이라도 제외시켜 달라며 사정하던 일이며, 한 장이라도 떨어뜨리면 안 된다며 오히려 반대 입장이 되어 간청해오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단원의 막이 성공적으로 내렸다. 봄부터 울었던 소쩍새 덕분에 금년 농사는 풍년이 되었다. 소쩍새 울음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