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의 외출
긴 어둠을 헤치고 Y시를 떠날 때 수경은 스치는 창밖을 보며 그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한참을 터미널을 벗어날 동안 그의 모습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긴 허탈감에 빠져 자리를 가다듬고 앉는 순간, 수경은 얼핏 스치는 광경에 눈이 머물렀다. 희미한 수은등 아래서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켜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 무엇을 기대하며 여기에 왔을까. 수경은 차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의 어떤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그의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기에? 오지 말았어야 할 길을 왔었나….
옅은
어둠이 깔리는 강가에서 수경은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가만히 씹어 보았다. 그리고 커피숍에서 그녀는 남편이 아닌 그를 위하여 얼굴 화장을 매만졌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빚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음악들이 흘러 나왔다. 꿈많던 시절에 듣던 음악부터 지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까지……. 낯선 도시, 낯선 자리에서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계속 어둠만을 지켜보았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더 영롱한 빛을 발하는
거리의 불빛들도…….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다. 지금은 낯선 사람이 되고 있는 옛날의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바바리의 깃을 세우며
수경은 10년만의 만남에서 그녀의 세월을 보이지 않으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 없는 메아리가 가슴을 울리고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맺혔을 때 그는 그녀 앞에서 있었다.
"오랜만이오."
"오랜만이에요."
10년만의 만남치고는 너무도 흔한 인삿말을
주고 받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K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H가 서른이 훨씬 넘도록 혼자인
이유를 모르니. 이 바보야. 너 때문이야……."
그날 이후 수경은 가슴 한 구석에 가을바람이 지나가는 소릴 들었다.
그리고 그
바람소리는 새벽녘에 만취가 돼 들어온 남편에게 잔소리를 마구 헤대던 그녀의 모습이 밥맛 떨어진다고 아침도 먹지 않은 채 휭하니 나가며 미친듯
닫아 버리던 아파트 문 사이로 또 한번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수경은 먼지 묻은 수첩 속의 옛 전화번호를 돌렸고 Y시로
향했었다.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둘의 얘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만으로 시간을 메꾸었다. 커피숍에서 미리 일어난 사람도,
식당에서 빨리 나가자던 사람도, 바로 그였다. 돌아갈 시간이 늦다고 차표를 서둘러 끊어준 사람도 그였다. 그리고 수경은 떠밀리는 양처럼 차에
올랐다. 그는 그녀를 보냈고, 그녀는 그를 떠났다.
이대로 가긴 싫어. 수없이 외치는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차는 떠나기 시작했다. 바보,
바보, 수없이 뇌아렸다. 마음은 아직 그의 곁에 두고 왔는데 몸은 달리고 있었다.
처음 Y시를 찾을 때 수경은 많은 얘기들을
준비했었다.
그와의 처음 만남. 마음만 주고받을 뿐, 가슴에 품은 말 한마디 못 뱉었던 바보스러움. 그리고 서로를 가슴에서 못내 지우고 산
아픈 날들의 얘기들을…. 하지만 그는 억지로 듣기를 거부했고 수경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사람. 하루의 외도인데,
10년만의 만남인데 어찌 이렇게 삶의 굴레를 지키려 들었을까? 그녀는 못다한 한 마디에 마음이 쓰렸고, 그는 못 들은 그 한 마디에 수은등 불빛
속에서 그녀를 보냈다.
속절없이 차는 그가 있는 Y시를 점점 멀리하고 있고 차창 밖을 바라보는 수경의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와의 사이엔 10년이란 세월이 놓여 있는 것을…. 그리고 그가 한 마지막 한 마디가 아직도 수경의 귓전을 맴도는
것을….
"나, 다음 달에 결혼할 거요."
하지만 그도 알았으리라. 서로 바라보던 아픈 눈망울의 사연을….
Y시를 떠난 차가
점점 집 가까이 오고 S시의 환한 불빛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자 수경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친정에 맡기고 온 어린것은……?
엄마를
찾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침의 태도에 미안해하며 일찍 퇴근해 멋쩍은 웃음을 보여줄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자 수경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오늘의 이 부끄러운 외출을 그에겐 뭐라고 얘기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