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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메

죽장 2005. 9. 12. 17:42

  수만년 전의 화산활동이 있었을 때 용암이 산천을 덮어씌워 아주 특이한 모양의 산들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약한 사암과 단단한 용암과의 결합으로 형성된 바위속에 그들만의 터전을 만들었다. 쉽게 파낼 수 있는 바위지만, 또 쉽게 무너지지도 않아서 사람이 들아가 살 수 있는 집을 만들기가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유네스코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직전까지 사람들이 주거지로 사용하며 살았다고 한다.

 

내부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크레스코와 성화들을 비롯하여 각종 생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교회의 천장과 벽에는 예수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나타내는 그림들이 퇴색된 채 있었다.

 

  계곡 전체에 흙기둥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다. 어떤 바위기둥은 껍질을 뒤집어 쓰고 있는 길죽한 도토리 모양 같았다. 단단한 용암이 뚜껑으로 되었고, 아래의 사암은 오랜 세월동안의 풍화작용으로 길게 깍여서 그런 모양으로 변했을 것이다. 도토리가 두개, 세개씩 붙은 모양의 것들도 있다. 그들은 또 지하에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 살았다. 특히 신앙을 지키려는 신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처음 동굴을 파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BC1,200년 경부터 여러 제국들이 전쟁을 하면서 패잔뱡들이 숨어 들어 은신처를 만들었고 그후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면서 오늘과 같은 지하도시가 형성되었다. 많을 때는 200만명 정도가 생활을 했던 지하도시에 발견된 교회만도 1,000개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하도시 '데린구유'와 '카이막카르' 중에서 카이막카르에 들어갔었다. 가이드는 입구에서 느스레를 떨며 잔뜩 겁을 준다 '앞사람의 뒤꼭지를 놓으면 미아가 된다'. '길을 잃은 한 처녀가 아기를 안고 나온 적이 있다'는 등... 8,000명의 인구가 6개월간 먹을 수 있는 식량저장고를 비롯하여 삶의 모습들이 남아 있다. 특히 지상으로 뚫린 통기구를 만들어 환기는 물론이고 흙을 퍼낸다거나 할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외부의 침입자들을 차단할 수 있는 맷돌모양의 큰 돌도 있고, 부엌, 포도주 저장소, 시체매장지 등 집단생활의 기능이 완벽하게 있다. 지하 12층까지 있으나 현재는 지하 8층까지만 공개되고 있었다.

 

  괴뢰메 야외박물관 외에도 낙타모양의 바위들이 솟아잇는 델브란트 계곡, 버섯모양의 바위들이 솟아있는 파샤바 계곡을 지나서 앙카라를 향하는 발길을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