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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죽장 2022. 5. 30. 15:47

  오월도 중순이 넘어가면 들판의 보리가 누렇게 익어간다. 예전 같으면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다. 몇 해 전부터 이맘때만 되면 그 귀한 쌀을 한 포대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예”라는 단 한 문장으로 일 년만의 안부를 떼우며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는 사나이다. 온몸에서 순박한 끼가 줄줄 흐르는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빈손으로 나타나서 자기 집에 잠깐 다녀가라는 말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집 열려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창고에서 정미기(精米機)를 돌리고 있다가 맞아주며 앞장서서 텃밭으로 간다. 뒤따라가니 열무, 상추이파리가 반겨준다.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는 쑥갓, 청경채, 케일, 치커리도 아는 척한다. 줄기가 가늘지 않고 토실토실하다. 아주 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것이 물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싹이 트고 자라는 기간을 고려하여 열무 씨앗을 넣고, 상추 모종도 심었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흘린다. 생나물 겉절이용으로 딱 알맞게 자랐다며 아낌없이 뽑는다.

  집에 돌아와 쌀 포대를 챙겨 넣은 다음 나물 보따리를 풀어놓으니 식탁이 가득하다. 열무이파리에 벌레가 파먹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은 달팽이의 짓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진딧물이 끼고, 배추벌레가 간간이 보였지만 농약을 치지 않고 견뎠다고도 했다. 씻지 않은 상태로 신문지로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한참 동안 보관이 가능할뿐더러 간혹 이파리들이 시들해져 있더라도 물에 담그면 갓 뽑아온 것처럼 살아난다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지 십 여 년이 가까워온다. 딱딱한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가볍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평생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리저리 얽혀왔던 주변 사람들이 급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음이다. 삶의 반경이 축소되면서 인간관계도 동시에 축소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배워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정말 고맙다. 근면한 일상으로 스스로를 닦달하며 살아가는 모습에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를 보면서 직장 일 틈틈이 논농사를 짓고 텃밭에 채소를 키우는 부지런함에서 한 인간의 근본을 읽는다. 쌀을 찧어서 담아주고, 때에 맞춰 채소를 길러서 아낌없이 뽑아주는 손길에 타인을 배려하는 정석의 깊이를 느낀다. 쌀 포대를 내려놓고 웃음 짓는 얼굴을, 텃밭에 채소를 심어놓고 물을 주며 뽑을 날을 기다리는 그 마음을 세상 어떤 그릇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비해 내가 가진 그릇을 내려다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다. 내 작은 그릇에 무엇을 얼마만큼 담아서 내놓을 것인지 생각해봐야겠다.

 

  조선배추와 열무를 섞어서 담근 물김치가 익으면 갓 찧어온 쌀로 지은 밥상을 받으리라. 먹지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있는 오월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