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5.20, 영남일보]
나는 갑과 을이다
- 이병동 씨프로덕션 대표·CF감독 -
“감독님, 차 한잔하러 지금 좀 들어오시겠어요?” 우리 회사에 영상물 제작을 의뢰하는 광고회사의 강 상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조심스럽게 내가 묻는다. “들어와서 차 한잔하면서 얘기합시다.” 전화상으로 용건을 바로 말하지 않고 차를 앞에 내세우는 것은 뭔가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3일 안에 그걸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강 상무의 말을 다 듣고 내가 던진 말이다. “무조건 해 주셔야 합니다.” 강 상무도 단호하다. 우리는 말 그대로 찻잔을 사이에 두고 팽팽히 맞선다. 나는 장황하게 이유를 대면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딱 잘라 일 자체를 거절하진 못한다. 강 상무도 미안한 표정과 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물러서지는 않는다. 결국 나는 그 일을 들고 회사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강 상무는 갑이고 나는 을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돼요.” 우리 회사 편집디자이너가 일성을 내뱉는다. “무조건 해야 된다.” 나는 강 상무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편집디자이너에게 한다. 디자이너는 주말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것에 몹시 짜증을 냈지만 사표를 쓰지는 않는다. 나 또한 그런 직원에게 많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긴 했지만 물러설 수 없는 일이다. 회사에서 위계상 나는 갑이고 직원은 을이다.
돌아서기 무섭게 갑인 강 상무는 을인 나를 전화로 죄기 시작한다. 나는 또 을인 직원에게 빨리하라고 독촉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 상무의 전화는 더 빈번해진다. 나도 녹음실에 전화를 넣어 언성을 높인다. 녹음실은 나의 을에 해당하는 셈이다.
갑인 광고회사에는 결제금액을 조율하는 표 국장도 있다. 빨간색 펜으로 금액마다 일일이 줄을 친다고 해서 일명 ‘빨간 펜 선생’이다. 내가 청구한 금액을 이발하듯 세밀하게도 깎는다. 그는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유능한 직원이다. 똑같은 방법으로 나는 녹음실과 촬영팀의 청구금액을 깎는다. 결제할 때가 되면 줄줄이 이발소가 된다. 갑은 을에게 을은 또 그의 을에게, 깎기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강 상무의 회사는 애오라지 갑인가? 아니다. 그 갑은 또 건설회사의 을이 된다. 애초에 갑인 건설사가 을인 광고회사에 3일 안에 영상물을 만들 것을 주문했을 것이다. 갑인 광고회사는 을인 나를, 갑인 나는 을인 직원과 녹음실을 줄줄이 사탕으로 엮은 것이다. 청구금액 또한 똑같은 연결고리로 깎기의 도미노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건설회사는 최종 갑인가? 아니다. 건설회사에게는 또 다른 갑이 있다. 인·허가 관련 관공서도 갑이 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갑은 아파트를 구매할 소비자다. 적정한 가격과 우수한 품질의 아파트를 적기에 내놓지 못한다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갑인 소비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을이다. 그 소비자 속에는 나도 포함된다. 건설회사의 을의 을인 내가 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갑을관계로 뜨겁다. 전문가들이 수많은 해법을 내놓는다. 갑은 을의 입장을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자세를 가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갑은 을의 입장을 다 알고 있다. 갑이 을이고 을이 갑이기 때문이다. 다만 을로서 당하는 나의 고통만 보이고 갑으로서 자행하는 나의 횡포는 보지 않을 뿐이다. 모질게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라고 해서 어진 시어머니가 되지는 않는 법이다.
강 상무에게 또 전화가 왔다. “감독님, 덕분에 일이 잘되었습니다. 제가 삼겹살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표 국장에게 전화한다. “국장님, 결제 고맙습니다. 문어숙회 한 번 쏘겠습니다.” 갑은 을 덕분에, 을은 갑이 있어 모든 갑과 을이 살아남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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