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쳐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색 활옷이었다. 붉은 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엷어져서 글씨를 쓰기에 마침 맞았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가는대로 경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냈다. 바라기는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 것이고, 두 어버이의 아름다운 은택이 느꺼워 뭉클한 느낌이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피첩(霞 帖)`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붉은 치마를 돌려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초가을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강진 유배 시절 다산 정약용의 글이다. 그는 이곳에서 19년을 귀양 살았다. 초로의 병든 아내는 무슨 마음으로 시집 올 때 입었던 빛 다 바랜 치마를 천리 먼 길에 보냈던 걸까? 남편은 그 속을 헤아려, 자를 대고 치마를 자르기 시작했다. 조각조각 치마를 잘라 공책을 만드는 동안, 다산의 머리 속에 휘돌아 나가던 상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치마 조각 위에는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를 적었다. 벌써 여러 해 째 가족과 떨어져 살던 아버지의 아비 노릇하는 슬픈 광경이다.
배접을 해서 책으로 묶고, 표지에는 `하피첩`이라고 썼다. 하피는 `노을치마`다. 그 붉고 선명하던 치마는 이제 노을 빛만 남았다. 우리 두 사람의 사랑도 이제는 저녁 노을 같구나. 그리움에 애가 타기는 해도 조바심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젊은 날의 열정도 이젠 빛이 다 바랬다. 사각사각 가위질은 차라리 무념무상에 가깝다.
아들에게 주는 글을 쓰고도 치마 한 폭이 더 남았던 모양이다. 시집간 딸 생각이 났다. 이번엔 좀 크게 자른다. 그림을 그려 줘야지. 매화 가지에 꽃이 피었다. 봄이 왔다. 둥치는 그리지 않고, 빗겨 나온 가지만 그렸다.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가만 보니 꾀꼬리다. 두 마리 꾀꼬리는 몸을 포개고 한 가지에 앉았다. 한 녀석은 먼 데를 보고 있고, 딴 짓 하던 한 녀석도 무슨 일인가 싶어 문득 고개를 돌려 제 짝과 눈길을 맞춘다. 그림 아래 여백에 시를 한 수 짓고, 곁에다 이렇게 썼다.
가경 18년 계유(1813) 7월 14일, 열수(洌水) 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내가 강진서 귀양산 지 여러 해가 지났다. 홍부인이 낡은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어, 붉은 빛이 바랬길래 이를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서 두 아들에게 주었다. 그 나머지를 이용해서 작은 가리개로 만들어 딸에게 보낸다.
처음 아내가 보낸 치마를 받고 위 〈하피첩서〉를 쓴 것이 1810년이었다. 그리고 딸에게 준 이 그림은 1813년이니 둘 사이에는 3년 이상의 거리가 있다. 아들을 위해 네 개의 첩을 만들어 훈계하는 말을 적어 보내고는 치마 생각은 까맣게 잊었겠지. 다시 몇 해의 세월이 흐른 뒤, 집안을 정리하다가 그때 자르다 남은 치마가 나왔던 모양이다. 앞에서는 아내가 부쳐온 것이 다섯 폭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여섯 폭으로 적은 걸 보면, 생각지 않았던 치마 한 폭을 뒤늦게 찾아냈던 걸까? 마지막 남은 치마 한 폭은 시집 간 외동딸에게 주기로 작정을 했다. 매화 가지 아래 적은 시는 이렇다.
펄펄 나는 저 새가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도다.
여기에 올라 깃들어 지내며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꽃이 이제 다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달리겠네.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 其實
꾀꼬리 한쌍이 매화 향기를 따라 내 집 마당으로 날아 들었다. 추운 겨울이 다 끝난 것이다. 새들은 향기에 취해 나뭇가지를 떠날 줄 모른다. 즐거운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 쓸쓸하던 마당이 갑자기 환하다. 다산은 새들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가 그렇게 좋으냐? 나도 너희들이 좋구나.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꾸나. 네 짝과 더불어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보렴. 매화꽃이 이렇게 활짝 피었으니, 조금 있으면 매실(梅實)이 주렁주렁 매달리겠지. 그때는 함께 매실을 따먹으며 재미있게 놀아보자꾸나."
하지만 새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멀리서 달려오는 봄빛만 바라보고 있다. 네 글자로 된 시경(詩經)풍의 고체시다. 그래서 《시경》에 나오는 시와 비슷한 구절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아가위꽃(常 )〉이란 시는 분위기가 서로 비슷하다. 〈아가위꽃〉은 옛날에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하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이 가운데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아내와 자식이 정답게 지내는 것이
마치 금슬을 연주하는 것 같아도,
형님과 아우가 화목해야만
즐겁고 기쁘다고 할 수가 있다.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대의 처자식을 즐겁게 해주어라.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妻子好合 如鼓琴瑟
兄弟其翕 和樂且湛
宜爾室家 樂爾妻帑
是究是圖 亶其然乎
가족과 형제가 화목하게 지낸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이 없겠다. 그러니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아내와 자식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소망이 정말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섯째 구절에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宜爾室家`란 말이 나온다. 다산의 여섯 번째 구절의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樂爾家室`란 말과 비슷하다. 다산이 일부러 《시경》의 표현을 빌려와서 담으려 했던 뜻도 여기에 있다.
네가 보고 싶지만, 아비는 너와 함께 지낼 수가 없구나. 미안하다. 하지만 매화 가지를 찾아온 저 멧새처럼 함께 지내고 싶은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니. 너도 지금은 한 사람의 아내요,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가 되었다. 형제간에 우애롭고 가족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네가 더 노력하렴. 그러면 저 예쁜 꽃이 진 자리에 알찬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듯 네 집안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 언제나 가득할게다.
다산이 딸에게 이 그림을 그려 주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치마에 그려 보내준 그림을 보고, 멀리 계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울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시집 오시던 날 입었던 빛바랜 치마 위에 아버지가 써 주신 훈계의 말씀을 받아 들었을 때, 자식들의 가슴은 얼마나 뭉클하였을까? 딸을 위해 그려준 그림과 시는 지금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 떨어져서 입을 수 없게 된 치마가 이렇게 해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 그림과 시가 참으로 아름다운 까닭은 그 안에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끊임없이 자식들을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다. 행여 그릇될세라, 학문을 게을리 할세라 노심초사를 그치지 않았다.
네가 양계를 한다고 들었다. 닭을 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닭을 기르는 데도 우아한 것과 속된 것, 맑은 것과 탁한 것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농서를 숙독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렴. 빛깔에 따라 구분해보기도 하고, 횟대를 달리 해보기도 해서 닭이 살지고 번드르하며 다른 집 보다 번식도 더 낫게 해야지. 또 간혹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도록 해라.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 이것은 글 읽는 사람의 양계니라. 만약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거들떠보지 않는다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몰라, 부지런히 애써 이웃 채마밭의 늙은이와 더불어 밤낮 다투는 자는 바로 세 집 사는 마을의 못난 사내의 양계인게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하려는지 모르겠구나. 기왕 닭을 기른다면 모름지기 백가의 책 속에서 닭에 관한 글들을 베껴 모아 차례를 매겨 《계경(鷄經)》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구나. 육우의 《다경(茶經)》이나 유득공의 《연경(烟經)》처럼 말이다. 속된 일을 하더라도 맑은 운치를 얻는 것은 모름지기 언제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1805년 유배 4년만에 맏아들 학연이 강진으로 아버지를 뵈러 왔다. 그 편에 작은 아들 학유에게 보낸 당부의 편지다. 공부하는 사람의 양계는 보통 사람의 양계와는 달라야 한다. 옛 전적에서 닭에 관한 기록을 모아 목차를 세워 정리하고, 닭을 관찰하여 시로 짓도록 해라. 이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면, 얼마나 훌륭하겠니? 그는 지금 아들에게 양계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귀한 것은 성실함이다. 어떤 것도 속여서는 안된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다. 임금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사꾼이 이웃을 속이거나, 장사꾼이 동료를 속이는 것 모두 죄에 빠지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속여도 괜찮으니, 바로 자기 입이다. 모름지기 거친 음식으로 잠시 지나가는 것, 이것이 좋은 방법이다.
올 여름에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일이다. 상치에 밥을 싸서 움켜쥐고 이를 삼켰다. 손님이 내게 물었지.
"쌈 싸 먹는 것이 절여 먹는 것과 다를까요?"
내가 말했다.
"이는 내가 입을 속이는 방법일세 그려."
매번 밥 한 끼를 먹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해라. 정력과 지혜를 쥐어짜 더러운 뒷간을 위해 충성을 바칠 것 없다. 이런 생각은 당장 눈 앞에서 가난함에 대처하는 방편만은 아니다. 비록 부귀가 하늘에 닿을 정도라 해도 사군자가 집안을 거느리고 몸을 다스리는 방법에 근면과 검소를 버리고는 손댈 만한 곳이 없을 것이니라. 너희들은 꼭 명심하도록 해라. 경오년(1810) 9월 다산 동암에서 쓰노라.
상치 쌈은 왜 싸는가? 장을 찍어 주먹만하게 밥을 싸서 먹는다. 겉모습만 보면 푸짐해 보여 좋지만 속엔 밥 뿐이다. 이것으로 식욕을 돋궈 입을 속인다는 것이다. 입에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똥이 되고 말 음식을 위해 정력과 지혜를 소모하지 말아라 그것은 화장실에 충성을 바치는 일이다. 근면과 검소, 그리고 성실, 이것은 선비가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니라. 글 제목이 〈두 아들에게 주는 훈계(又示二子家誡)〉이고, 쓴 시점으로 보아, 아내의 치마에 써준 글의 한 부분이었던 듯 하다.
그 사이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것은 1801년 겨울이었다. 막내였던 농아(農兒)는 아비가 귀양 올 때 세 살 짜리 어린아이였다. 이듬해인 1802년 연말에 다산은 농아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농아 이전에도 그는 이미 자식 다섯을 땅에 묻었었다. 농아도 홍역을 앓다가 마마로 번져 죽었다. 아버지는 이미 캄캄한 언 땅 속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차갑게 누워 있을 어린 아들을 위해 글을 지었다.
농아(農兒)는 곡산에서 잉태하였다. 기미년(1799) 12월 2일에 태어나 임술년(1802) 10월 30일에 죽었다. 발진이 나서 마마로 번지더니, 마마가 악창이 되었던 까닭이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고 있었으므로, 글을 지어 그 형에게 보내 곡하게 하고, 그 무덤에 읽어주게 하였다. 농아를 곡하는 글은 이러하다.
네가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 겨우 세 해였는데, 나와 헤어져 지낸 것이 두 해가 된다. 사람이 60년을 산다 치면 40년을 아비와 헤어져 지낸 셈이니, 슬퍼할만 하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내 근심이 깊었기에 네 이름을 `농(農)`으로 지었다만, 뒤에 집 형편이 나아지면 어찌 너를 농사나 지으며 살게야 했겠느냐? 하지만 죽는 것 보단 나았겠지. 내가 죽었더라면 장차 기쁘게 황령을 넘어 열수를 건넜을테니,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도 멀쩡히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도 죽었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내가 네 곁에 있었다해도 꼭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 어머니의 편지에, 네가 "아버지가 내 곁에 돌아오셔도 발진이 나고, 마마에 걸릴까?"라고 했다더구나. 네가 무슨 헤아림이 있었던 것은 아닐텐데도 이런 말을 했다니, 네가 아비가 돌아오면 의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게로구나. 네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가슴 아프다.
신유년(1801) 겨울, 과천의 객점에서 네 어머니가 너를 안고 나를 전송했었다. 네 어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저 분이 내 아버지시다"했더니, 너도 따라서 나를 가리키며, "저 분이 내 아버지"라고 했었지. 아버지라 했지만 아버지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몰랐을테니 슬프기만 하다.
이웃 사람이 가는 길에 소라 껍질 두 개를 부쳐 네게 주도록 했었다. 네 어머니의 편지에 네가 강진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소라 껍질을 찾다가 얻지 못하면 풀이 푹 죽곤 하더니, 죽을 때가 되어서야 소라 껍질이 왔더라고 썼더구나. 아! 마음 아프다.
네 모습은 깎아놓은 듯 예뻤다. 코 왼편에 작은 점이 있었지. 웃을 때면 양 어금니가 뾰족했었다. 아아! 나는 오직 네 모습만 생각하며 거짓없이 네게 알린다.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니, 생일 날 묻었다 한다.
농아는 다산이 곡산부사로 있을 때 그곳에서 잉태하여, 서울서 낳았다. 당시 다산은 천주교 신봉 문제로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농아가 태어난 뒤 바로 다산은 자신을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식을 이끌고 마재로 돌아오고 만다. 아들의 이름을 `농(農)`으로 한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글 배워 우환을 만들지 말고 그저 농투성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였다.
자식이 아비를 찾다 죽어도 가볼 수조차 없는 아비의 노릇이 참담했던지, 죽었어야 할 것은 정작 자신이라고 했다. 헤어질 당시 뜻도 모른채 아버지라고 말하던 어린 것은 인편에 부친 소라 껍질 두 개로 못난 애비를 기억했을 것이다. 농아는 고작 세 해를 살고 제 생일날 흙에 묻혔다.
마마로 죽은 아들이 못내 가슴 아팠던 아버지는 뒤에 천연두를 치료하는 방법을 정리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이란 책을 지어, 안타까움을 달랬다. 절망을 극복하는 다산다운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