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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행 스케치

죽장 2007. 5. 16. 10:59

 

  땅끝마을에 닿았다. 길섶에 소복하게 돋아있는 클로버가 반겨준다.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들풀인데도 전해오는 느낌이 달랐다. 네 잎 달린 것이 있는가 생각하며 내려다보니 행복이라는 꽃말이 떠올랐다. 줄기 채 뜯어 목걸이며 반지를 만들었던 클로버꽃이 남도 도착을 알리는 신호등이 되어 켜져 있다. 붉은 해가 다도해 너머로 떨어지기를 머뭇거리고 있는 시각, 고운 노을이 빈 하늘을 채우고 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슴팎에 안겨든다.

 

  일찍 눈이 뜨였다. 「땅끝전망대」로 오르는 길, 떡갈나무 이파리에 푸른 이슬이 잔득 맺혀 있다. 부지런한 어부가 고깃배를 몰아 망망한 대양으로 내닫는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 같다. 물결이 철썩이며 다가와 갯가에 부딪치니 땅끝의 아침이 열린다. 바닷물을 흘리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햇살을 따라 세상이 일어선다. 반짝이는 아침바다를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한다. 한반도 최남단에서 맞는 아침이 신선하다.

 

  보길도를 향해 내닫는다. 허연 물거품이 소용돌이치며 여객선을 따라온다. 다도해 푸른 섬들이 바다에 잠겨있다. 전복이며 다시마 양식장임을 알려주는 부표들이 온바다를 뒤덮고 있다. 갈매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니 「청별항」도 금방이다. 윤선도의 영혼이 달려 나와 마중해준다.

 

  해남에서 병자호란을 맞은 윤선도는 나라를 구하려 나섰다. 가병을 진두지휘하여 강화도로 향하던 중 삼전도의 항복소식을 듣고는 뱃길을 돌렸다. 보길도에서 세연정을 만들고, 갈매기를 벗삼으며 끓는 선비의 기개를 삭였다. 절창 「어부사시사」를 읊으며 만년을 보낸 세연정에 오월 봄바람이 가득하다. 늦동백 몇 송이 떨어지고 있다.

 

  보길도로의 워크아웃이었다. 눈앞에 가득한 상록낙엽수 능선을 바라보는 「동천석실」이 한가롭다. 예송리 해변을 때리는 파도가 몽돌을 굴리고 있다. 나라 잃은 윤고산의 한숨이 고운 동백으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선비의 가슴에 맺힌 한이 구르고 구르는 몽돌이 되어 검은 광채를 내 품고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가 들리는 듯 하다.

 

  다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의 일상을 벗어난 남도행, 눈에 띄는 것 모두가 희열이었다. 보길도 파도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세연정에 지고 있는 동백이 눈에 삼삼하다. 윤선도가 그리워진다. 그보다도 바닷바람 시원한 여객선에서 전복을 안주하여 마신 소주맛이 활력으로 살아난다. 낯선 풍광과 아픈 역사를 만끽한 남도에서의 한 때였다.